칠레 광부 33명이 전 세계인들의 영웅이 되어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땅 밑으로 2,300피트, 아득한 ‘지하 감옥’을 뒤로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그들의 강인한 의지, 첨단 테크놀로지를 동원한 완벽한 구출작전이 기적을 이뤄냈다.
지금은 모두 추억담이 되었지만 8월5일 갱도가 붕괴되고 그들의 생존이 확인되기까지 17일 동안 그들은 지옥의 시간을 살았다고 한다. 그 캄캄한 절망 한가운데로 희망의 빛을 내려 보내준 것은 직경 5인치의 가는 통로였다. 수천길 암반을 뚫고 내려간 실핏줄 같이 가는 관이 지상과 지하 대피소를 연결하는 기적의 끈이 되어 음식과 약, 생필품을 내려 보내고 건강 체크며 화상통화까지 하는 소통의 통로가 되었다. 지하의 그들에게 기어이 가서 닿으려는 마음이 통로를 뚫게 하고 결국 그들을 살려냈다.
수천 길 지하만큼이나 아득한 의식의 저편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과 소통의 통로를 잃어버리고 캄캄한 고립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 - 의식의 갱도가 붕괴된 치매 환자들이다. 몸은 눈앞에 있지만 그들의 의식은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매몰 광부들 찾기 만큼이나 아득하다. 기어이 가서 닿으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들의 의식에도 가서 닿을 수가 있는 것일까.
근 10년 전부터 이따금씩 소식을 전해오는 독자 홍연수(58)씨가 며칠 전 팩스로 편지를 보내왔다. “어머니가 치매가 심하셔서 제가 모십니다. 한 1년이 지나고 있어요”라고 했다. 치매 걸려 가엾기 그지없는 어머니를 보며 가슴이 울컥해 쓴 글을 같이 보냈다.
“삶의 긴 여정 속에서도 오직 하나, 자식들을 염려하는 그 마음의 끈을 놓지 못하는 나의 엄마. 힘들었던 평생의 삶을 떨구어 버리지 못하고 치매라는 또 다른 삶을 살아가시는 나의 엄마. 세월이 흘러 일곱 자식들의 머리에도 세월의 흔적이 완연하지만 엄마는 세월을 거꾸로 돌려놓으시고 오래 전 어린 나이의 자식들로만 기억하신다.…”
지금 그는 어머니를, 어린 아기처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기저귀 갈며 하루 24시간 돌보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가 어머니와 항상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 좋기만 한 아버지를 대신해 평생 집안 살림을 주도한 그의 어머니는 성격이 강한 편이었다. 그런데 5-6년 전부터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불같이 화를 내고 의심이 많았다. 자녀들이 방문하면 “내 물건 훔쳐간다”며 들들 볶아서 한 시간을 머물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어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에게도 너무 심하게 해서 그런 어머니를 미워했지요. 그게 치매의 초기 증상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어요. 작년 5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양로병원에 입원하시면서 알게 되었어요”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의식세계에 “내가 가서 닿아야 겠다”는 노력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고집불통에 막무가내라서 말이 안 통하는 어머니의 외면 대신 그 왜곡된 내면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모든 것을 어머니의 편에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그거 네가 가져갔지?” 하면 아니라고 반박하는 대신 “그래요. 내가 다시 가져 올게요”하는 식이다.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어머니와 같이 살며 보살핀 지 1년. 지금 그의 어머니는 화를 내는 법이 없다. 무슨 말을 해도 웃기만 하는 아기 같은 노인이 되었다. 사랑으로 성심껏 보살피니 치매로 매몰된 의식의 갱도가 뚫리고 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곁에서 모셔보니 어머니가 이해되더군요. 어머니의 미국생활이 너무 외로웠어요. 7남매 모두 저 살기 바빠서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어머니가 전화를 해도 급하게 끊기 일쑤였지요. ‘자식들 키워도 다 소용없다’는 좌절감과 분노가 속으로 깊이 뭉쳐있었던 것 같아요”
외로움이나 좌절, 분노가 치매를 불러왔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부정적 감정들을 거둬내니 어머니의 의식이 맑아진 것을 그는 느낀다. 여전히 혼란은 있다. 자신을 젊은 엄마로, 60 다된 홍씨를 어린 딸로 알며 학교 도시락 걱정을 한다. 하지만 의심과 분노로 막혔던 감정의 물꼬가 트이니 어머니는 딸을 완벽하게 의지하며 행복하다. 그의 편지를 인용한다.
“지나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훨씬 짧은 삶의 길목에서 젊은 엄마와 어린 딸로 다시 한번 모녀의 정을 쌓으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남은 시간에는 이 딸이 엄마 역을 맡고 엄마가 딸의 역을 맡는 것이지요”
모든 인연의 완성은 이런 완벽한 소통이 아닐까. 기어이 가서 닿으려 하면 결국은 닿아진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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