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되니 주위에서 “어느새 가을!"이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말이다. 새해 시작해 250여일- 눈에 뛰는 성과나 기억에 남는 멋진 날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보다는 종종 걸음 치며 바쁘게, 끊임없이 속 끓이며 살았다는 기억 뿐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걱정, 근심, 불안에 떠밀려 한 순간도 온전하게 시간의 주인으로 살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토론토 의과대학에 도널드 레들마이어 박사라는 특이한 교수가 있다. 내과전문의이지만 그는 사람들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더 몰두해왔다. 독특한 이슈를 수명과 연결시키는 작업들이다. 운전 중 셀폰 사용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1997년 운전 중 통화가 음주운전만큼이나 위험하다는 연구 결과를 최초로 내어놓은 것도 그였다.
1999년 그는 자동차 차선 변경과 수명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차선을 자주 바꾸면 교통사고 위험이 3배나 높다는 것이 연구결과였다. 운전자들이 차선을 바꾸는 이유는 항상 옆 차선이 더 빠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옆 차선 차들이 앞지르는 것 같아 차선을 바꾸면 그때는 또 원래 차선이 더 빠른 것 같은 경험을 누구나 한다. 차선에 따른 속도 차이는 별로 없고 사고 위험만 높아진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운전 중 행여 뒤처질까 안달하며 차선을 바꾸고 또 바꾸는 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마음 비우고 가나 가슴 졸이며 가나 결과는 비슷한 데 걱정하느라 삶을 즐길 여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모습이 에스키모, 즉 이누이트 족의 노래에 담겨 있다.
“여름에 인생은 경이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름이 나를 행복하게 했습니까.// 아니오. 나는 순록 가죽과 바닥에 깔 모피를 구하느라/ 늘 조바심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늘 걱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빙판 위의 고기잡는 구멍 옆에 서 있을 때/ 인생은 경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기잡이 구멍 옆에서 기다리며 나는 행복했습니까.// 아니오.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까봐/ 나는 늘 내 약한 낚시 바늘을 염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늘 걱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잔칫집에서 춤을 출 때 인생은 경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춤을 춘다고 해서 내가 더 행복했습니까.// 아니오. 나는 내 노래를 잊어버릴까봐/ 늘 안절부절 못했습니다./그렇습니다. 나는 늘 걱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 "
불안, 걱정으로 여름도, 낚시도, 잔치도 즐기지 못한 채 한 해, 한 평생을 보내 버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이다. 그 여름이 마지막 여름, 그 낚시가 마지막 낚시, 그 잔치가 마지막 한번 남은 잔치라 해도 그렇게 낭비를 하게 될까?
미국인 작가 중에 캐서린 러셀 리치라는 50대 여성이 있다. 그는 매년 1월이면 한 웹사이트에 들어가 인사를 한다 - “나 아직 여기 있어요" 그리고 나면 얼굴도 모르는 수백명의 여성들로부터 답장이 온다. “어떻게 그럴 수가?" “나도 아직 여기 있어요. 3년 되었어요" … 유방암 4기 여성들의 사이트이다.
리치는 30대 초반이던 1988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5년 후인 1993년 1월 4기 진단을 받았다. 4기란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돼 더 이상 손 쓸 방도가 없다는 의미이다. 의사는 2년 반 정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아주 예외적인 일이 일어났다. 암이 더 심해지지만 않도록 다스리며 한해 두해 살다 보니 이제껏 살고 있다.
근 20년을 그는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는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불확실성이 꼭 나쁜 건 아니더라고 그는 말한다.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르니 순간순간을 최대한 음미하며 살게 된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내일 걱정 없이 과감하고 하며 살게 된 것이다. 암을 몸 안에 안은 채 그는 책을 두권 썼고 힌디 말을 배우러 인도에 가서 1년을 살기도 했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갖고 싶은 것은 갈라파고스 여행기회 같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은 일상의 삶이었다고 한다. 가족들과 모여 식사하고 웃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다. 우리가 당연시 하는 일상이다.
불확실성은 암환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운명이다.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뿐이다. 걱정을 내려놓고 오늘을 온전하게 살아야 이 가을에 추억 하나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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