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첫날,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워싱턴 D.C. 교외에 사는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이 있는 데서 멀지 않은 곳의 디스커버리 채널 빌딩에서 무장인질극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용의자가 ‘제임스 리’ 인데 코리안 같다”고 걱정을 했다.
이후 몇시간 나 역시 “제발 코리안은 아니었으면 …” 하며 불안하게 뉴스를 지켜보았는데 허사였다. 그는 한인 아버지와 일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코리안 혈통으로 확인되었다.
주류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하는 범죄 사건들에 한인이 ‘주인공’으로 떠오르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지난 주 LA에서는 이란계 남성 3명이 아파트에서 한꺼번에 총격 살해돼 TV 뉴스들이 시끄러웠는데 그 용의자로 한인남성이 체포되었다.
전에는 한인이 다인종 범죄사건에 연루되면 십중팔구 피해자였다. 한인관련 범죄는 주로 한인끼리의 사건이거나 타인종 강도에 의한 피해사건들이었다. 한인사회가 커지고 구성원이 다양해진 때문일까. 주류언론의 주목을 받는 대형 사건에 한인들이 용의자로 등장하고 있다.
“제발 코리안은 아니었으면 …” 하고 마음 졸이던 경험이 전에도 있었다. 3년 전 버지니아 텍 총기난사 사건 때였다. 주류 미디어들이 ‘조승희’의 이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조’ 가 이름인지 성인지 우왕좌왕 하던 몇 시간, 그 참혹한 광란의 주인공이 한인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그는 한인 1.5세였다.
제임스 리와 조승희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성장기에 놀림과 괴롭힘의 대상이었고, 종종 왕따였으며, 이후 어느 시점부터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외톨이로 살았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철저하게 추방당한 느낌, 그래서 분노와 적개심에 이성은 마비되고 망상이 머릿속을 휘젓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절망감에 자기 나름의 ‘산화’를 택한 삶의 낙오자들로 보인다.
제임스 리가 인질극에 사용했던 권총은 육상경기 때 쓰는 출발신호용 피스톨로 확인되었다. 그의 인질극은 남을 해치려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해치기 위한 것이었다. 사건 직후 그의 동생도 “그가 총격 사살되었다는 소식에 슬프다. 하지만 아마도 그것이 그가 바랐던 것일 것”이라고 수년째 연락두절이던 형에 관해 말했다.
제임스 리는 마우이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던 편모슬하에 자랐다고 한다. AP가 보도한 마우이, 라하이날루나 고교 1985년 졸업사진을 보면 그는 반듯하게 잘 생긴 모습이었다. 그런 소년이 황폐하게 망가져 처참하게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2년 전 미국심리학회에 아시안 아메리칸에 대한 연구보고서가 발표되었다. UC 데이비스 심리학과 연구진이 18세 이상 아시아계 성인 2,000여명을 직접 면담해 분석한 자료였다. 이때 아시안의 특징으로 지적된 것은 정신건강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가족’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시안이 자살 충동적 행동을 할 때 우선 짚어보아야 할 것은 가족과의 불화라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특히 아시안 2세들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부모의 기대라는 사실도 지적되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은 나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데 …”라는 부담감에 짓눌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수치심이 유난히 높다는 것이다.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자책감이 우울증을 초래하면서 자살충동을 부추길 수 있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한인부모들이 자녀에 대해 기대가 높은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 잘 되라고…” 이민도 왔고 궂은일도 마다 않는 것을 아이들도 잘 안다. 그래서 아이들은 문제가 있어도 감히 부모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부모는 너무 바빠서 아이의 문제를 눈치 채지 못한다. 이렇게 ‘방치’된 어느 순간 해맑던 아이들은 사회 부적응자의 길로 들어선다.
한인사회는 미국에서 대표적 성공 커뮤니티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성실함 덕분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이 없지 않았다. 오늘 누릴 행복은 내일로 미루어졌다.
제임스 리와 조승희는 우리 커뮤니티의 성공신화 그 이면의 희생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공의 산이 높을수록 낙오자들이 느끼는 절망의 골도 깊은 법이다.
성취에만 고정되어 있던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그래서 오늘 웃을 웃음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사랑할 사랑을 내일로 미루지 말았으면 한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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