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를 읽은 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뉴스 속의 정보이거나 숫자에 불과했던 ‘그들’이 피가 돌고 체온이 따뜻한 살아있는 사람들, ‘우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편견과 무관심으로 나무토막 같던 가슴을 촉촉하게 녹여 관심과 이해의 싹을 틔우는 것 - 바로 문학의 힘이다.
지난 2003년 발표되자마자 베스트셀러로 주목받았던 이 소설은 아프간 이민 1.5세인 할레드 호세이니(45)의 데뷔작이다. 1979년 소련 공산군이 아프간을 점령하자 외교관이던 아버지가 그 이듬해 정치망명을 함으로써 그의 가족은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15살이던 그는 샌호세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인근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후 UC 샌디에고 의대를 나와 내과의사가 되었다. 1세 부모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준 모범 1.5세이다.
의사로 자리 잡고 살던 그가 작가가 된 것은 타고난 글 솜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2001년 9월11일 알카에다의 참혹한 테러가 그의 전업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을 해본다.
1992년 4.29 폭동을 계기로 우리의 1.5세·2세들 중에도 삶의 방향을 바꾼 케이스가 적지 않았다. 남가주 한인상권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을 때, 1세들이 피땀 흘려 이룬 삶의 터전을 폭도들에게 강탈당하고 망연자실했을 때, 그런데도 주류언론은 ‘한흑 갈등’만 부각시키며 교묘하게 한인사회에 책임을 떠넘겼을 때, 1.5세와 2세들은 커뮤니티의 대변인으로 발 벗고 나섰다. 우리 커뮤니티가 오해받고 그래서 불이익 당하는 사태를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안에 갇혀있던 1세 커뮤니티를 위해 그들은 입을 열고 귀를 열었다.
9.11 테러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근 3,000명에 달하는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이다. 다음 달로 사건 발생 9년이지만 그 가족들의 상처는 아직 피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테러로 직격탄을 맞은 또 다른 피해자는 미국 내 700만 무슬림 커뮤니티이다. 9.11 테러 이후 무슬림 시민들은 미국사회의 싸늘한 시선을 숨죽여 받아내야 했다. "테러분자는 아닐까?"하는 경계의 눈빛, 노골적 냉대와 모욕, 심한 경우 테러를 당해도 ‘아프다’고 소리칠 수 없었다.
무슬림이라면 무조건 알카에다나 탈레반과 한 통속으로 보려드는 미국사회에 호세이니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인해 누구보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고아가 된 조카를 찾기 위해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으로 숨어들었다가 동족의 처참한 생활상을 목격하고 그 자신 반송장이 되어 탈출한다.
9.11 테러의 여진이 새삼 미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뉴욕의 무슬림 커뮤니티가 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 인근에 이슬람 센터를 건립하려는 계획 때문이다. 특히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세력들이 끼어들면서 ‘그라운드 제로’와 ‘이슬람’이라는 두 단어만 듣고 분개하는 이들로 미 전국이 시끄럽다.
여론을 가장 자극하는 것은 ‘그라운드 제로 이슬람 사원’이라는 표현이다. "테러 현장에 이슬람 사원을 세우다니 테러를 찬양하는 거냐"며 앞뒤 안 가리고 흥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104층 높이로 뉴욕의 최고층 빌딩이 될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테러 극복의 상징이자 미국의 위용을 드러낼 건물이다.
무슬림 커뮤니티가 계획 중인 건물은 ‘사원’은 아니다. 회의실, 식당, 수영장, 농구장, 강당 등 시설과 함께 사원이 들어서 뉴욕 시민 누구에게나 개방될 커뮤니티 센터이다. 두 블록 떨어졌다 해도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보이지도 않은 위치이다.
9.11 테러 1주년이 갓 지난 2002년 11월 워싱턴의 펜타곤 건물에는 기도소가 새로 만들어졌다. 테러로 184명이 숨진 곳에서 불과 서른 발자국쯤 떨어진 위치이다. 국방부는 그곳을 이슬람 신자들에게 개방했다. "테러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분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미국다운 관용의 정신이었다.
20세기 초반 영국의 물리·화학자였던 제임스 듀어 경은 마음에 대해서도 전문가였던 것 같다. "마음은 낙하산과 같다. 활짝 열려야만 제대로 기능을 한다"는 말을 남겼다. 미국의 재산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다수의 열린 마음이 생명이다. 다수가 마음을 활짝 열고 관용으로 소수의 비애를 감싸 안을 때 사회는 앞으로 진화한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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