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에서 잘못된 판결이나 평결을 초래하는 가장 큰 원인은 목격자의 잘못된 진술이다. DNA 검사기법이 도입된 후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풀려나고 있다. 미국에서 지난해 6월까지 DNA 검사를 근거로 무죄가 밝혀져 풀려난 239명 가운데 잘못된 증인진술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사람이 무려 75%였다. 불완전한 기억이 사람 잡는 경우가 그만큼 많다는 말이다.
인간들은 마치 녹음기나 비디오처럼 사건을 기억 속에 기록한다는 것이 오래된 믿음이었다. 이런 믿음 때문에 법원에 증인으로 나온 사람들이 자신감 있게 들려주는 진술은 설득력 있는 증거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경험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있는 그대로 정확히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 복원되는 것으로 보는게 요즘의 정설이다. 즉 단편적 사실에 각자의 믿음, 욕구, 감정, 그리고 예감까지 섞어서 구성하는 것이 기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9.11 당시 어디 있었는가”와 같은 아주 중대한 사건에 대한 기억들조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형되기 일쑤다. 재판에서 증인 진술의 신빙성을 증명해야 할 책임을 피의자가 아니라 검찰이 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은 허점투성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전부라 여긴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우긴다. 이런 허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마술사들이다.
마술사들의 눈속임 원리는 간단하다. 관객들의 관심을 엉뚱한 곳에 집중하도록 만들면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자신의 트릭을 사용한다. 한 곳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집중력은 이처럼 ‘제로섬’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1999년 실시된 크리스토퍼 채브리스와 다니엘 시몬스 교수의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은 시각적인 인지가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보여준 고전적인 실험이다. 연구진은 똑똑하다는 하버드 대학생들에게 한편의 동영상을 보여줬다. 동영상에는 검은 유니폼과 흰 유니폼을 입은 6명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참가자들에게는 흰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몇 번 패스 하는지 세어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경기 중반 불쑥 고릴라 옷을 입은 사람이 등장해 선수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다 가슴을 두드리고는 사라졌다. 영상이 끝난 후 참가자들에게 고릴라를 봤냐는 질문을 던지자 대부분이 “웬 고릴라”냐는 반응을 보였다. 고릴라를 봤다는 참가자는 10%에도 못 미쳤다. 패스에만 집중하다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속성이 있다. 그리고 한 곳에만 집중하다 정작 중요한 다른 것들은 보지 못하고 놓쳐 버리는 우를 범한다. 이처럼 인간의 인식과 기억, 지식은 맹점투성이다. 우리가 보고 의식하는 것이 총체적인 진실과 동떨어져 있을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은 그래서 더할 수 없이 중요하다.
이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에는 절대 오류가 없다는 확신을 드러내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사는 곳은 날로 위험해 지고 있다. 광적인 이념주의자들과 광신도들이 바로 이런 부류들이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런 오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겸손해져야 하는지를 깨우쳐 준다.
두 교수는 얼마 전 다시 한번 비슷한 실험을 해 지난주 그 결과를 발표했다.
이 실험에는 이미 고릴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을 일부 참가시켰다. 그리고 동영상 중간에 커튼 색깔을 바꾸고 선수 한 명이 코트를 떠나는 장면을 넣었다. 그런데 고릴라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커튼 색이 바뀌거나 선수 한 명이 떠난 것을 눈치 챈 사람은 17%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고릴라에만 집중하다 다른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마술사들에 따르면 가장 속이기 쉬운 관객들은 무슨 트릭을 쓰나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사회적으로 본다면 이런 사람들은 여론조작이 가장 용이한 대상이기도 하다. 좀 더 폭넓게 볼 줄 아는 여유와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성숙한 사회일수록 조작과 휩쓸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인식이 지닌 한계를 잊지 않고 자신의 생각까지 의심할 줄 아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연구진의 조언은 그래서 귀담아 들을 만하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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