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경기 중 작전타임이 없다. 감독은 사이드라인 밖에서 손짓과 고함으로 작전을 지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기 전 상대팀에 맞춰 전략을 짜고 선발진을 꾸리는 일은 전적으로 감독의 몫이다. 또 경기 흐름에 맞춰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 때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역시 감독의 말과 행동이다.
전문가들은 축구 감독을 흔히 마에스트로에 비유하곤 한다. 직접 악기를 잡지는 않지만 오케스트라가 내는 소리는 마에스트로가 휘젓는 지휘봉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진다. 소리에 생명과 영감을 불어 넣는 것은 고스란히 마에스트로의 몫이다.
축구 감독 역시 선수들의 플레이에 영감과 생명을 불어 넣는 역할을 한다. 감독이 누구냐에 따라 플레이 스타일이 달라지고 팀의 명운이 좌우된다. 경기 중 감독은 단 3명의 선수를 교체할 수 있을 뿐이다. 기회가 많지 않다. 그만큼 결정적인 순간에 옳은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쯤 되면 축구를 감독의 경기라 불러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팀 지휘봉을 잡았던 히딩크는 한 명의 감독이 한 국가의 축구 패러다임까지 혁신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지 않았던가. 히딩크는 0대1로 뒤지던 이탈리아와의 경기 후반 수비수 3명을 공격수로 바꾸는 승부수를 던져 용병술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우승청부사’로 불리던 명장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축구종가 영국이 우승을 위해 연봉 1,000만달러를 주고 데려 온 이탈리아 출신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영국팀이 1회전에서 졸전을 거듭하면서 체면이 말이 아니다. 또 조롱거리로 전락한 ‘콩가루팀’ 프랑스의 레이몽 도메네크 감독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어제의 명성이 오늘의 영광을 보장해 주지 않는 것이 승부의 세계이다. 인심은 조석변이고 감독은 오직 성적으로만 말할 뿐이다. 사람들은 과거의 호성적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늘의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면 곧바로 비난이 쏟아진다.
예선전에서 승승장구해 국민들의 큰 기대를 받았던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한국대표팀이 1차전에서 멕시코에 1대3으로 패한데 이어 네덜란드에 0대5로 대패하자 감독이 대회 도중 경질됐다. 이것이 감독의 운명이다. 쓰다가 용도가 다 됐다 싶으면 버려지는 소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표팀에 ‘히딩크 호’니 ‘허정무 호’니 하면서 감독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 남기라는 배려가 아니라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팀을 이끌라는 주문인 것이다. 감독은 팀 분위기, 그리고 성적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에 있다.
한국팀이 나이지리아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천신만고 끝에 대망의 16강에 진출했다. 1차전 그리스 승리로 낙관적이던 월드컵 16강 티켓이 아르헨타나전 대패로 다시 멀어지면서 팀 분위기는 롤러코스터를 탔고 허정무 감독 역시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1차전의 찬사는 아르헨티나에 패하자 하루아침에 용병술과 전술의 실패라는 비난으로 바뀌었다.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았을 텐데도 속히 분위기를 추스르고 선수들을 다독거려 나이지리아 전에 대비한 감독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은 외로운 자리이다. 이기면 영웅이 되고 지면 역적이 된다. 똑같은 전략과 전술을 사용했더라도 평가는 결과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진다. 가령 박주영과 염기훈을 투톱으로 내세운 것을 두고 믿음의 축구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축구팬들이 있는 반면 감독의 아집이라고 못마땅해 한 팬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16강 진출을 이룸으로써 감독의 용병은 신뢰가 거둔 결실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이처럼 외줄타기를 하는 듯 아슬아슬한 길을 가야하는 것이 감독의 운명이다.
승리를 일궈내는 방정식은 감독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명장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명장이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기에 명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라운드의 냉엄한 법칙이다.
한국인 감독으로 첫 월드컵 16강을 일궈낸 허정무 감독은 일단 모두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승전보를 이어가 명장의 반열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것은 감독 개인의 영광일 뿐 아니라 한국 축구의 유쾌한 반란을 뜻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조윤성 /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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