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새벽을 깨운 LA 한인들의 힘찬 함성이 태극전사들에게 그대로 전달됐는지 월드컵 첫 경기에 나선 한국 팀이 그리스를 통쾌하게 격파하며 산뜻하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목이 터져라 합동응원을 펼친 수만 한인들의 표정에서는 환희가 넘쳐났다. 새벽 4시까지 모이려면 거의 밤을 새우고 나왔을 터인데도 집단적 열기 때문인지 이들에게서 피곤함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8년 전 한국의 월드컵 4강 신화 이후 합동응원은 하나의 이벤트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한국 팀의 주요 경기가 열릴 때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당시의 짜릿한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일수록 같이 보면 더욱 재미있다.
심리학자인 로버트 프로빈 교수는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을 혼자 볼 때보다 여럿이 같이 볼 때 웃음이 30배나 더 터져 나온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밝혔다. 그래서 합동응원의 짜릿함에 한번 맛들이면 헤어나기 힘들다. 그러니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한밤중의 합동응원을 극성이라고 섣불리 폄하해서는 안 된다.
한국이 통쾌하게 이긴 후 한인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총평은 대략 2가지다. 하나는 “한국축구가 달라졌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역시 박지성”이라는 찬사였다. 한국축구는 분명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주눅 들지 않은 채 시종 자신감 있게 플레이를 펼치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같은 변화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선수가 박지성이다. ‘국민주장’ 박지성은 그리스 전에서 그라운드의 조율사로서, 때로는 해결사로서 유감없는 활약을 펼쳤다. 특히 후반 박지성이 터트린 추가 골은 왜 그가 한국 최고의 축구선수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장면이었다.
8년 전 4강 신화 때도 박지성은 좋은 축구선수였지만 지금의 그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그는 정체를 거부하며 계속 진화하고 있다. 이것이 축구선수로서 박지성의 훌륭한 점이다. 박지성 개인의 진화는 한국축구의 진화와 맞물려 있다. 그의 족적을 후배들이 뒤따르고 있고 그것은 고스란히 한국 축구의 힘이 되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박지성은 축구선수로서 치명적인 평발이다. 또 체격이 왜소해 한때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런 박지성이 성공한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그는 우직해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성실하다. 그라운드에서는 물론이고 밖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한다.
박지성은 문화와 환경이 다른 해외에서 성공하려면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영리한 선수다. 그리스 전이 끝난 후 유튜브에서 찾아 본 박지성 동영상 중에는 일본 언론과 유창한 일본어로 인터뷰하는 장면이 있었다. 일본어뿐 아니라 영국에 진출해서는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다른 분야의 책들도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읽는다. 박지성의 인터뷰를 보면 다른 선수들보다 한결 정제된 어휘와 표현을 사용하는데 다 그럴만한 바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리함과 성실성만으로 프리미어 리그와 월드컵을 휘젓는 박지성의 저력을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박지성은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가장 큰 원동력은 ‘자기암시’였다고 말한다. 그라운드에 나설때 마다 자신에게 “이 경기장에서는 내가 최고”라고 최면을 건다는 것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네덜란드 리그, 프리미어 리그 등으로 점차 단계를 높여가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자기암시의 힘이 컸다고 밝히고 있다.
자기긍정의 힘을 체계적으로 규명한 사람은 프랑스의 약사였던 에밀 쿠에였다.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문구로 유명한 쿠에는 긍정적인 상상의 힘이 의지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규명하는데 생을 바쳤다. 쿠에가 이 시대를 살았더라면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 해주는 사례로 박지성을 인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지성의 부단한 노력과 자기긍정은 특히 척박하고 낯선 환경에서 성공을 꿈꾸는 이민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라운드 위에서 박지성의 존재감은 11분1에 머물지 않는다. 주장인 그의 자기긍정은 다른 선수들에게까지 그대로 전염돼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로 나타난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놀랄만한 결과를 보여주겠다는 박지성의 장담이 허언으로 끝날 것 같지 않은 좋은 예감이 드는 것은 날로 진화하는 그의 경기력과 자기암시의 힘이 미덥기 때문이다.
조윤성 /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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