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성희롱’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991년 말이었다. 그해 10월 연방상원 법사위에서 클레어런스 토마스 연방대법관 지명자에 대한 인준 청문회가 열린 것이 계기였다. 1980년대 초반 그는 연방교육부와 균등고용기회 위원회에서 일했는데, 당시 부하 직원이었던 애니타 힐 교수가 증인으로 나와 성희롱 의혹을 제기했다.
‘성희롱’ 하면 한인남성들은 지금도 반 농담처럼 여기지만 20년 전에는 미국사회도 비슷했다. 여성들에게는 명백한 희롱이 남성들에게는 단순한 농담이거나 친근함의 표시로 일축되기 일쑤였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는 상원 청문회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흑인여성 힐의 증언에 대해 상원 법사위를 채운 백인남성들은 도무지 귀를 열지 않았다. 청문회를 지켜보던 여성들은 충격을 받았다. 예일법대를 나온 법과대학 여교수의 말이 저렇게 먹히지 않는다면 미국 사회에서 보통 여성들은 도대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 건가하는 분노가 뒤따랐다. 분노는 이듬해인 1992년 여성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는 ‘여성의 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토마스 대법관은 인준을 받았고 아니타 힐의 주장은 논란의 여지를 안은 채 역사 속으로 묻혔다. 하지만 청문회는 미국사회에 두 가지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인식과 여성의 정치참여 의식이다.
1992년 선거의 해를 맞아 미 전국에서는 유례가 없는 많은 여성들이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특히 주목을 받은 성과는 미역사상 처음으로 연방상원에 한꺼번에 4명의 여성들이 당선된 것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다이앤 파인스타인과 바바라 박서 두 여성이 상원의석을 차지하는 이변도 이때 일어났다. 여성 정치인들 사이에 “인준 청문회를 주관하는 상원이 너무 남성 일색이다.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탄탄한 공감대를 형성했었다.
18년이 지난 올해가 제2의 ‘여성의 해’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제까지 예비선거 결과를 보면 여성 후보들의 활약은 정말이지 눈부시다. 지난 8일 수퍼화요일의 가장 중요한 경선이었던 캘리포니아·네바다·아칸소의 연방상원 후보지명전, 캘리포니아·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지사 후보지명전에서 여성들이 빠짐없이 진출했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는 대기업 CEO 출신인 멕 휘트먼과 칼리 피오리나 두 여성이 연방상원과 주지사 공화당 후보로 나란히 뽑혔다. 피오리나의 민주당 적수는 4선에 도전하는 박서로 미국 역사상 여성끼리 대결하는 최초의 연방상원 선거가 되었다.
18년 전과 올해 선거의 ‘여성’을 보면 역사는 진보한다.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우선은 수적 팽창이다. 올해 선거는 연방상원 36개 의석, 연방하원 435개 전 의석, 39개 주지사직을 선출하는 데 상원 23개, 하원 216개, 주지사 23개 선거에서 여성 후보들이 승산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적자 재정과 높은 실업률 등으로 정치권에 염증이 난 유권자들이 새로운 얼굴을 원하는 추세가 여성들에게 득이 되고 있다.
‘수’보다 중요한 것은 ‘질’ - 여성 후보들의 달라진 태도이다. 1992년 여성들을 선거로 몰아간 근원은 일종의 피해의식이었다. 사회전반에 깔린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대표성이 필요하다며 여성에 대한 동정표를 호소했다.
2010년 여성 후보들의 특징은 자신감이다. ‘여성’임을 부각시키는 일도 없고 여성 이슈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전통적으로 여성후보는 지명도나 선거자금에서 턱없이 뒤지고 낙태권리 등 여성권리에 투철한 진보적 민주당 후보라는 이미지가 보편적이었다. 올해는 많은 후보들이 이 틀에서 벗어난다. 공화당의 보수적 여성후보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천문학적 돈을 선거자금으로 거침없이 쏟아 붓는 재력, 기업경영으로 확인된 능력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휘트먼, 피오리나 같은 후보들이다. 2008년 대선 당시 유권자들이 힐러리 클린턴에게 보였던 ‘강한 여성’에 대한 거부감도 올해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여성이 능력으로 인정받는 풍토가 정치권에서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징조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후보의 성별이 더 이상 유권자들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때, 그래서 더 이상 ‘여성의 해’라는 호들갑도 없을 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그때 진정한 남녀평등은 이뤄진다.
권정희 /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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