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에 사는 딸이 재미있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여성잡지 굿하우스키핑 1955년 5월호의 한 기사이다. 제목은 ‘좋은 아내가 되는 법’. 부엌에서 조리하던 아내가 귀가하는 남편을 반갑게 맞이하는 단란한 가정 풍경이 삽화로 곁들여져 있다.
10여 가지 조목조목 나열된 ‘좋은 아내’ 지침은 한마디로 남편은 집안의 주인이니 그가 기분 좋고 편안하도록 한치의 소홀함 없이 받들어 모시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남편이 귀가하면 바로 식사할 수 있게 준비하라. 남편들은 보통 집에 올 때면 배가 고프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서 당신이 얼마나 그를 생각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라. 남편의 귀가시간 전에 15분쯤 휴식을 취해서 남편이 도착하면 상큼하게 맞을 수 있도록 하라. 화장을 다듬고 머리에 리본을 달아 신선한 느낌을 주라. 그가 돌아오면 반색을 하며 맞으라. 직장에서 쳐진 그의 기분을 전환시키는 것이 당신의 의무다. 할 말이 있어도 그의 말에 먼저 귀를 기울이라. 당신이 할 말보다 그가 할 말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마라. 남편이 늦게 귀가한다거나 외박을 한다 해도 절대 불평하지 마라. 그는 집안의 주인이니 당신이 따져 물을 권리가 없다. …"
20세기 중반 가부장제 생활상에 21세기의 젊은이들은 때굴때굴 구를 듯이 재미있어했다. ‘전달’에 ‘전달’을 거듭하며 “너무 웃다가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코멘트들이 따라 붙었다. 조부모 세대의 엄연한 현실이 손자손녀 세대에는 ‘구석기시대’ 코미디가 될 만큼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지난 2일 한국에서는 대단한 화제를 모은 결혼식이 있었다. 배우 장동건과 고소영의 결혼식이었다. 결혼식 주례를 맡은 이어령 전 장관은 주례사에서 ‘황금잔’ 이야기를 소개했다.
로마시대에 어느 제사장이 집에 도둑이 들어 은수저를 여러 벌 도둑맞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을 황제가 위로를 하자 제사장은 오히려 싱글벙글했다. 도둑이 딴 집에서 훔친 황금잔을 은수저가 있던 자리에 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도둑이 들어 잃은 게 아니라 얻은 것이었다.
제사장은 “결혼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황제에게 말했다. 남녀가 결혼을 하면 자유와 자기 시간 등 잃는 것이 있지만 대신 평생의 반려자, ‘황금잔’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조금 잃고 더 큰 것을 얻는 ‘결혼’을 장려하기 위해 이 전 장관은 이 예화를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결혼과 출산 기피현상이 심각해진지 오래다.
결혼이 왜 이렇게 인기가 없어졌을까. 1950년대 굿하우스키핑을 탐독하며 집안 가꾸고, 케익 굽고, 몸단장하고 남편 맞으며 행복에 겨워하던 아내들은 어디로 갔을까. 여성의 사회진출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 그 외적 변화에 못 미치는 의식의 더딘 변화에 답이 있을 것이다.
21일 부부의 날을 맞아 한국 통계청은 ‘우리나라 부부의 자화상’ 통계를 발표했다. 의식구조와 문화가 비슷한 미주 한인1세들의 자화상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선 결혼에 대해 남성이 여성에 비해 긍정적이다. 기혼자 중 ‘결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남성은 10명 중 8명인데 여성은 6명에 불과했다. 배우자에 대한 만족도도 남성(70.6%)이 여성(60.8%) 보다 높았고 ‘이혼은 안 된다’는 생각도 남성(71.7%)이 여성(58.6%)보다 높았다.
결혼을 하니 남성은 편하고 좋은데 여성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 된다. 이유가 있다. 부부가 같이 직장일을 해도 집안일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기 때문이다. 가족 돌보고 집안일하는 데 아내는 매일 평균 3시간20분을 쓰는 데 반해 남편은 37분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말에 남편이 주로 하는 일은 TV·비디오 시청(34.6%)인 반면 아내의 경우는 집안일(31.9%)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면 여성들은 일단 몸이 지친다. 남편이 정말 ‘황금잔’인지 회의가 들게 된다.
며칠 전 영국에서 나온 보고서는 그런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남편이 집안일을 많이 할수록 이혼율이 낮고 가정이 안정적이라는 내용이다. 1970년 어느 한주에 첫 아이를 낳은 영국 부부 3,500쌍을 대상으로 장기간 추적한 연구결과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오래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부부는 오래, 아주 오래 가는 사이, 그래서 함께 가야하는 인연이다. 함께 가려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필수다. 아끼는 마음이다. 퇴근해서 지친 몸으로 저녁 준비하는 아내를 보면 혼자 TV 앞에 누워있기가 미안한 마음, 그래서 일어나 설거지라도 하게 되는 마음이다. 가사분담은 어쩌면 남녀평등의 문제가 아니다.
권정희 /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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