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미국 경제의 근간을 흔든 최대 위기는 ‘세이빙스 앤드 론’(S&L) 사태였다. 은행과 유사한 S&L은 일반 비즈니스가 아닌 주택구입 대출을 주로 하는 금융기관이었다. 고객들의 예금은 연방정부가 지급을 보장해 줬다. S&L에 이런 특권을 주는 대신 리스크가 낮은 곳에만 투자하도록 책임을 요구하며 강력히 규제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 물가가 치솟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인플레가 지속되면서 금리가 덩달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S&L은 이자 경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은행들과 경쟁을 벌이기에는 영업구조가 너무 취약했다. 많은 S&L들이 파산 위험에 몰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나서 고객들에게 예금을 돌려주고 부실 기관들을 정리하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 정부와 의회는 S&L 사태를 수습하는데 있어 정면 돌파 대신 편법을 택했다.
S&L을 조이기는커녕 오히려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고객 예금에 대한 지급 보증은 그대로 둔 채였다. 기존 특혜에 새로운 특혜를 얹어 준 것이다. 거칠 것 없어진 S&L들은 고객을 잃을 걱정 없이 마음껏 투기에 나섰다. 이런 도덕적 해이는 몇 년 후 1,500억달러라는 천문학적 공적 자금을 쏟아 붓게 되는 위기를 불렀다.
사태가 수습된 후 S&L 위기를 면밀히 분석한 브루킹스 연구소는 만약 1981년 정부와 의회가 단호하게 칼을 뽑아 들었더라면 150억달러 정도의 비용으로 부실기관 정리를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초기에 올바르게 대응했더라면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일을 키웠다는 지적이었다.
병증이 나타났는데도 치료가 부담스럽다고, 또는 당장의 비용이 걱정된다고 회피한다면 병을 키우고 결국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연방정부는 이런 우를 범한 것이다.
이런 실수의 저변에는 레이건 행정부의 탈규제 분위기 속에서 가속화 된 미국 경제의 금융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삐 풀린 금융화가 자리 잡고 있다. S&L 사태가 지나간 후 한 통찰력 있는 경제전문가는 “상업은행들과 월스트릿의 문제는 아직 터지지 않고 있지만 그것은 순전히 운일 뿐”이라며 또 한 차례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예측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월스트릿의 행운이 메인스트릿에는 불행임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지난 일요일 시사프로에 나와 “재임 중 월스트릿을 규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가 재임 중 개혁에 손을 댔더라면 이후 금융위기로 인한 출혈과 피해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지난 주 연방증권거래위원회가 월스트릿의 거인인 골드만삭스를 사기혐의로 제소했다. 리스크가 높은 상품을 팔면서 투자가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아 10억달러의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손실이 한 헤지펀드와 골드만에게는 고스란히 이익이 됐다는 점이다. 월스트릿의 행운이 어떻게 메인스트릿에는 불행이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이다. 한 칼럼니스트는 이런 행태를 ‘약탈’로 지칭한다.
골드만삭스는 금융위기 속에서도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려 “역시 골드만”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골드만 회장은 지난 연말 거액 보너스에 비판 여론이 일자 “우리는 신의 일을 한다”며 건방을 떨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동안 월스트릿이 내놓은 ‘어닝 서프라이즈’의 이면에는 이처럼 광범위하고도 체계적인 기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신의 아들’인양 거들먹대는 월스트릿을 그냥 방치할 경우 이들이 괴물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아니, 어쩌면 이들은 벌써 제어하기 힘든 괴물이 돼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골드만 케이스가 터지자 금융개혁을 추진해 온 오바마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이 문제를 중간선거 득실 같은 정치적 시각으로만 바라보다가는 본질을 놓칠 수가 있다. 잘못을 할 경우 혹독하게 책임을 묻는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도덕적 해이는 불 보듯 뻔하다.
지나친 규제는 시장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지만, 규제하지 않을 경우 한층 더 심각한 파국을 초래한다는 교훈을 지난 30년간 반복돼 온 금융시장의 위기는 던져주고 있다. 여기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2018년께 또 한 차례 경제적 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억만장자 조지 소로스의 경고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조윤성 /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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