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과 강풍이 오고 이상한 날씨가 겹치는 등 미국 각지에서 계절로는 힘든 날들이었지만 지난겨울 우리는 많이 행복했었다. 동계올림픽이란 예전에는 일본이 겨우 이름만 올려놓을 정도이지 아시아 국가들과는 별로 상관없는 구경거리로만 알아온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모국 한국 선수들은 너무나 훌륭한 전적으로 우리 모두를 자랑스럽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연아란 아름다운 젊은이의 우아한 스케이팅은 온 세계인들에게 스포츠는 경쟁에서 얻는 감동보다 더 높은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우리 미주한인 거의 모두가 미국인 친구들에게서 좋은 인사를 받은 건 덤이었다고 치자.
그런데 피겨스케이팅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기대와 희망을, 그것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국가 위신까지 나이어린 선수 한 사람의 퍼포먼스에 거는 것처럼 미디어에서 몰아가고 있을 때 필자는 김연아란 젊은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것은 너무나 힘든 주문이었다.
선수는 자기 자신의 최선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보람을 즐길 수 있어야 했다. 어린 선수의 어깨를 누르는 온 나라의 기대가 얼마나 부담이 되었던가는 퍼포먼스를 끝내고 나오는 선수의 억누른 울음이 증명한다.
우리는 그의 믿을 수 없도록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감동하고 좋았지만 이제 우리의 확신을 기둥삼아 좀 의젓한 한국민들이 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한다. 며칠 전 로이터통신이 한국 어느 의대에서 획기적 관절치료를 보도했다고 국내의 미디어에서 수선을 떤 일이 있었다. 좋은 뉴스였지만 우리는 외국의 누구가 우리를 이렇게 칭찬했다는 그걸 가지고 떠드는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선진조국이 되는 게 아닐까 한다.
오래 전 미국에 한 학기 연구하러 나올 때에도 ‘미 국무부 초청’이란 수식어가 꼭 붙곤 했던 때가 있었다. 비자서류와 프로그램 스폰서가 국무부이었을 것이지만 이렇게 해야 좀 권위가 붙는다고 믿었던 것 같다. 또 지금은 쇠락한 어느 한국 자동차회사 사장으로부터 언젠가 미국에서 만나볼 분 소개를 부탁받고 최고 경영자의 비전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클레어몬트의 피터 드럭커 교수와 얘기를 하는 게 어떤가 했더니 비전과 별로 상관없는 분야의 어느 유명대학 교수를 만나고 갔다는 얘길 나중에 전해 들었다.
그리고 우린 이제 어린 아이들이 학교에서 학생회장 당선된 것을 갖고 ‘총’학생회장 되었다고 하고, 반장된 것을 학생회장으로 쓰고, 조그만 교민사회 모임의 살림을 살면서 사무총장이라고 쓰고 하는 일들에서는 교민사회 미디어에서부터 좀 달라지는 성숙함을 보였으면 한다.
대학의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모여 전체 종합대학의 회장을 뽑았다고 총학생회장이라고 불렀는데 어린이회장을 총학생회장이라고 부르는 희극은 도리어 모독에 속한다. 그리고 미국 방송에서 개고기 먹는 한국인 욕을 때때로 하거든 개고기를 먹는 게 사실이니까 우리가 그런 야만성에서 졸업할 때까지는 그냥 조용히 욕먹고 사는 성숙함을 보이는 게 좋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런 때의 야단법석은 모두 우리의 열등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미국은 SNL이나 코미디 채널에서 보듯이 자기 나라 대통령도 코미디언들에게 걸리면 동네 강아지 얘기하듯 조롱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한데 다 그렇게 한번 웃고 넘어가면 된다. 거기에 핏대를 내고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우리 모두 우리 자신들의 성숙함에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누가 나를 어떻게 얘기하는가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버지니아텍 사건이 났을 때 한국에서 난리가 난 것처럼 법석이었다. 그때 이 칼럼에서 그걸 다루면서 그렇게 야단 법석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한 적이 있는데 미국사회의 비극 속에서의 조용한 성숙함을 보고 모국에서는 나중 조금 느낀 점이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가 한국에서 교육을 받을 때는 도덕이란 과목이 있었다. 그것이 군사정부에서 반공으로 바뀌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세월이 너무나 달라진 지금 모국에서는 글로벌 시대의 예의, 외국인들과 이웃으로 살 때의 예의, 국제 경쟁에서의 예의, 자기와 다르게 생긴 사람이나 자기만큼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외국인들과의 관계에서의 예의, 도움을 준 이에 대한 고마움을 알고 표시하는 예의… 이런 것들을 가르쳐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이종열 / 페이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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