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3일 역사적인 의료개혁안에 서명했다. 191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처음 제안한 이후 여러 차례 추진됐으나 번번이 무위로 끝났던 의료개혁이 근 100년 만에 현실화 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전 국민 의료보험을 갖지 못한 유일한 선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어 던지게 됐다.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임을 자임하지만 의료 문제에 이르면 이런 자부심이 무색해진다. 몇 년 전 세계 보건기구는 경쟁력 측면에서 본 미국의 의료 체계를 37위로 평가했는데 지금은 이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아졌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1인당 의료비 지출은 다른 유럽에 비해 2배가 넘지만 정작 의료의 질은 이들 나라에 훨씬 못 미친다. 의료개혁이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던 의사들이 이번 개혁안에 긍정적 반응을 나타낸 것은 미국의 의료 시스템이 더 이상 방치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의료 서비스의 사각지대로 내몰려 있는 수천만 미국인들을 껴안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격에 관한 문제이다. 하지만 우선순위로 볼 때 도덕적 책무는 대개 현실적 삶이라는 눈앞의 요소에 밀리곤 한다.
또 유권자들은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보수적이다. 별다른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 한 기존의 정책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동안 무수한 개혁 논의들이 실패로 끝났던 것은 국민들의 두려움을 악용한 개혁 저항세력의 교묘한 캠페인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다.(이 같은 캠페인은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수위로 또 다시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다.)
지난 1월 매사추세츠 연방상원 보궐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해 민주당의 상원 60석이 무너졌을 때 의료개혁은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3월은 역시 이변의 달. 대학농구 토너먼트에서 하위 팀들이 강호들이 잇달아 격침시키면서 ‘3월의 광란’을 연출하고 있듯이 오바마는 승산 없어 보이던 싸움에서 극적인 업셋을 이끌어 냈다.
의료개혁 논쟁을 벌여 온 워싱턴 정가의 풍경은 1935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역사적인 소셜시큐리티 제도를 추진했을 때와 너무 흡사하다. 당시 공화당은 이 제도를 “소셜리즘적인 발상”으로 몰아붙이며 공격했다. 또 법안이 통과된 후에는 법안 무효화를 위한 소송과 민주당을 몰아내자는 캠페인이 줄을 이었다. 소셜시큐리티는 이런 십자포화 속에서 살아남아 그나마 미국의 체면을 살려주는 복지제도로 남아 있다.
역사적인 의료개혁안 탄생에는 ‘여걸’ 낸시 펠로시 연방하원의장의 역할과 보험사들의 자충수라는 행운이 작용했지만 오바마의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바마는 90명이 넘는 의원들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를 걸어 설득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50여 차례나 국민들 앞에 서서 의료개혁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상대를 만나는 일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확고한 정치적 소신과 이것을 자신감 있게 피력할 만한 인문적 소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개혁은 이런 담대함과 인내, 그리고 소통의 리더십이 거둔 결실이다. 고도로 연출된 대화나 이벤트성 행사만 가질 뿐 직접 소통은 극력 기피하는 철학 빈곤 대통령들과는 대조적이다.
의료개혁안이 통과되지 못했더라면 오바마의 정치생명은 사망선고를 받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이번 개혁추진은 도박이었다. 그렇다고 개혁안 통과가 오바마에게 정치적 실익이 될지는 의문이다. 국민 여론이 여전히 호의적이지 않은데다 공화당의 공세가 거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정치인들과 국민들 앞에서 사용하는 표현들을 보면 중간선거와 재선 같은 당대의 심판보다는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는 자세가 확연하다.
의료개혁의 내용은 방대한데 국민들의 여론은 단편적 내용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와 작은 이해관계에 의해 갈리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혁을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면 현재의 여론추이는 얼마든 변할 수 있다.
의료개혁이 확정되자마자 곧바로 위헌소송이 제기되는 등 개혁의 앞날은 평탄치 않아 보인다. 이제 갓 싹을 틔운 의료개혁이 순조롭게 뿌리를 내릴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오바마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 만약 이 일에 실패할 경우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는 그의 바람은 물 건너간다. 오바마의 리더십은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참고삼아 역사책을 들춰 본다면 공화당의 극렬한 반대 속에 소셜시큐리티가 도입된 후 치러진 1936년과 1938년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다.
조윤성 /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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