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이 돌아가셨다. 나도 모르게 일손을 놓았다. 나는 불교신자도 아니고, 그 분을 만나거나 설법을 들은 적도 없다. 아는 것이라곤 그 분 글의 향기, 특히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읽게 된 ‘무소유’의 향기다. 풍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알지 못하는 분의 죽음인데도 가슴이 착잡하다. 단출한 삶의 모범을 보이신 분.
나는 지금 캔터키의 내 사무실에서, 오하이오 강북의 하늘을 찌르는 고층 빌딩을 창밖으로 내다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송광사와는 거리가 한 겁쯤 멀어도, 여기서 40분쯤 가면 또 다른 ‘법정’을 만날 수가 있다. 농가에 사는 시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이다. 그는 한 비가(悲歌)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모든 것 속에 숨어 있다(He is hidden among all that is),
그는 사라질 수가 없다(And cannot be lost).’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서 난초 이야기를 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극 정성으로 더위와 추위에서 보호했던 난을 어느 날 갑자기 남에게 줘버린 얘기다. 난에 너무 집착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년에 운 좋게 웬델 베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역시 번잡한 삶을 피하며 솔직하고 단출하게 사는 지혜롭고 의지가 강한 사람인데, 땅과 그 농작물에 집착해 있었다. 그는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그 집착으로 농사를 잘 지어냈다.
30년 전 아내와 친지 몇이,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이 따고 닦아서 말린 차를 직접 대접 받은 적이 있었다. 나를 만나기 전 아내의 기억이지만, 그 간접 기억은 나까지도 설레게 한다. 송광사가, 22년 전 한국 여행에서 봤던 산들과 겹쳐지면서 잔잔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한 사람의 삶을 음미하는 것은 나에겐 마치 천연 우울증 치료제 한 방울과 같다. 서양인들에게 신비하기 만한 ‘한약’ 봉투를 여는 것과 같다.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거나 혹은 한문만 쓰인, 아니면 번역이 있어도 어려운 라틴어 식물이름이 쓰인 가루약과 약초. 그러니 멀리 있는 현자의 삶의 일부를 맛보는 것은 신비한 ‘한약’ 한 모금인 것이다.
우리의 삶이 법정 스님 혹은 웬델 베리의 삶과 아주 멀어진 것을 자각하게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한약’을 한 모금 마시자. 스트레스, 일, 부모님과 자식 걱정, 서서히 사라지는 삶에 대한 두려움. ‘한약’을 먹으면 갈래 길에 서게 된다. 꼭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하는가? 미련 없이 버려야 하는가?
오래 전부터 나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요술 같은 상상을 즐겼다. 때론 6학년 때의 어떤 날 등 특정시간을 골라서 가기도 했다. 그렇게 되돌아간 후, 잠깐 기절했다 일어나는 척하면 적응을 잘 못해도 주위 아무도 내 정체를 눈치 못 챌 것이라는 엉뚱한 계산까지 했다.
얼마 전엔 2000년의 한국행 747 비행기 안으로 되돌아갔다.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서 다시 1년을 살게 되니, 긴장과 걱정 속에서도 마냥 행복했다.
그랬는데, 요즘엔 완전히 반대되는 상상을 한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상상 대신, 과거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상상한다. 현재의 시간이 2040년 3월이라 상상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사랑하는 이를 앞서 보낸 후, 호흡곤란을 겪으며 수많은 기계와 연결된 채 누워 아픔과 싸우는 중이다.
“아, 몇십 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최근이라도 좋다. 조금만이라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아, 내 소원이 이루어졌다! 갑자기 2010년이 되었다”
지금 이 칼럼을 쓰는 시간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창밖의 하늘이 푸르다. 집에 가면 아내와 아들이 있다. 매일 일에 밀리고, 근심과 걱정에 쫓긴다. 그러면 어떤가. 그렇게 원하던 과거로 되돌아오지 않았는가! 과거에서 현재를 꼭 붙들어 잡고 있는 것이다. ‘현재’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케빈 커비 /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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