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가 꼭 베스트 작품이나 상품은 아니라는 것을 82회 아카데미상이 다시 한번 증명했다. 사상 최고 수입을 올린 ‘아바타’와 작품 성격과 흥행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던 여성 감독 캐스린 비글로의 작품 ‘허트 라커’가 올 아카데미상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비글로는 아카데미 역사상 여성으로서는 처음 감독상을 받았다. 지난 82년 간 감독상 후보에 오른 여성은 비글로를 포함해 4명에 불과하다. 감독상을 발표하러 나온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봉투를 열어 수상자를 확인한 후 비글로를 바라보며 “그때가 왔다”(The time has come)고 말했다. 여성 감독들이 받아 온 오랜 설움을 날려 버리게 됐다는 감격의 표현이었다. 올 시상식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었다.
‘허트 라커’는 이라크 전쟁을 다루고 있다. 총 제작비는 1,000만달러를 조금 넘는다. 전쟁을 다룬 영화의 예산으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흥행성적은 더 초라하다. 극장이 가져간 돈을 빼고 홍보에 들어간 이런 저런 돈을 계산하면 여전히 적자일지도 모른다. 그런 영화가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며 온갖 찬사와 화제의 중심에 섰던 아바타를 눌렀으니, 진부하지만 골리앗을 눕힌 다윗의 승리 말고는 별 달리 비유할 방법이 없다.
이라크 전에 참전한 미군 폭발물 처리반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허트 라커’는 자기만의 색깔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자막에 뜨는 “전투의 격렬함은 마치 마약과 같은 치명적인 중독이다. 전쟁은 마약이기 때문”이라는 글귀가 반전영화라는 것을 암시하지만 보는 이들에게 메시지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허트 라커’에는 전쟁영화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대규모 전투신이 없다. 그런데도 시종 팽팽한 긴장감을 안겨준다. 카메라의 앵글은 아주 사실적이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직설적 화법을 피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관객들 각자의 몫이다.
전쟁을 주제로 한 ‘허트 라커’가 통상적인 전쟁영화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감독인 비글로가 가진 재능 덕이다. 비글로는 남성적인 주제를 많이 다뤄왔다. 하지만 그녀가 주제를 다루는 시선은 남성 감독들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이 때문에 비글로는 견제를 받았고 또 이것 때문에 아카데미상을 손에 쥐었다.
할리웃은 진보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곳이지만 여성 감독들에게는 냉혹한 ‘차별의 땅’일 뿐이다. 전체 감독들 가운데 여성 비율은 3%에도 미치지 못한다. 여성 감독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유럽이나 호주와 확연하게 비교된다. 얼마나 여성감독 찾아보기가 힘든지 “연방상원조차도 할리웃보다는 훨씬 진보적”이라는 우스개가 나올 정도다.
최근 할리웃에 페미니즘 바람이 불면서 여배우들의 호칭을 둘러싼 논쟁이 불거졌다. 남자 배우를 ‘actor’라고 하면서 여배우는 ‘actress’라고 달리 부르는 자체가 차별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오자 일부 영화 시상식에서는 여배우들을 ‘female actor’로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아카데미상에서 남우상과 여우상으로 나눠 시상하는 것이 여성에 대한 모욕이라는 불만까지 나오고 있다. 스포츠와 달리 예술적 표현의 영역에서는 남녀의 능력 차이가 없는데도 카테고리를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얼마나 공감을 얻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구호나 공허한 주장만으로 차별을 없앨 수는 없다. 현실을 바꾸는 힘은 말과 형식이 아니라 실력과 실적이다. 비글로는 남녀 구분이 없는 감독상과 작품상 부문에서 남성 감독들을 보기 좋게 누름으로써 어떤 페미니즘 캠페인보다도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비글로의 수상을 두고 드디어 할리웃의 셀룰로이드 실링이 깨졌다고들 호들갑이지만 한 여성이 감독상을 받았다고 차가운 현실이 하루아침에 따스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1940년대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할리웃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비글로의 수상은 그것을 보여주는 아주 작은 증거이다.
아무도 밟지 못했던 땅에 누군가 발을 내디디면서 길은 만들어진다. 스트라이샌드가 드러매틱하게 “그때가 왔다”고 외친 것은 새로운 길이 시작됐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조윤성 /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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