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의 한국 팀 선전에 한인들이 한껏 들떠 있다. 별달리 신나는 일을 찾아보기 힘든 요즘 젊은 한국선수들이 밴쿠버에서 연이어 전해오는 메달 소식은 많은 한인들에게 일시나마 삶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청량제가 되고 있다.
한국 팀이 따낸 메달의 숫자도 숫자지만 구성은 더 좋다.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신예 모태범이 동계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이 종목 금메달을 따낸데 이어 여자 500m에서도 기대주 이상화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지난 주말 벌어진 남자 5,000m에서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았던 이승훈이 은메달을 따낸 것 역시 쾌거라 할 만하다.
메달색이 같다고 가치까지 똑같은 것은 아니다.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의 메달은 하계올림픽 육상종목 메달에 비견될 수 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라는 올림픽의 기치에 가장 부합하는 종목이 바로 육상과 스피드스케이팅이기 때문이다.
스피드스케이팅에서의 좋은 성적 없이 동계스포츠 강국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한국은 그동안 숏트랙의 전통적인 강세를 바탕으로 올림픽 종합순위에서 상위에 올랐지만 어딘가 찜찜했었다. 이런 미진한 느낌을 스피드스케이팅의 금과 은이 한방에 날려주었다.
500m 금메달은 당초 한국 팀이 기대했던 메달이다. 그러나 5,000m 이승훈의 은메달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단거리는 아시아 선수들이 도전해 볼만한 종목으로 여겨져 왔지만 장거리는 체격이 큰 서구선수들의 독무대였다. 토요일 오후 레이스를 위해 네덜란드 선수와 나란히 선 이승훈은 한눈에 봐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아 보였다.
그러나 막상 레이스가 시작되자 우월한 기럭지의 상대를 앞서 나가며 아시아 선수로서 처음으로 장거리 종목에서 메달을 따내는 ‘큰일’을 저질렀다. 그의 은메달을 금메달보다 값지다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숏트랙 선수였던 이승훈은 숏트랙 국가대표에서 탈락한 후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꿨다. 국가대표에서 탈락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고 숏트랙 경험은 밴쿠버 은메달의 밑거름이 됐다. 이승훈의 좌절과 영광을 보면 ‘고난으로 변장한 축복’이라는 영어 표현이 그렇게 적절해 보일 수가 없다.
‘빙판의 반란’을 주도한 모태범과 이승훈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나는 메달 레이스에서 좋은 상대를 만났다는 점이다. 스피드스케이팅은 숏트랙처럼 여러 선수가 함께 뛰지 않는다. 또 혼자 레이스를 벌이지도 않는다. 2인1조가 돼 레이스를 펼친다. 그래서 누구와 뛰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이승훈은 2006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네덜란드의 밥 드용과 레이싱을 벌였다. 여전히 정상급이지만 30대 나이로 하향세인 밥 드용은 이승훈이 자극을 받으며 레이싱을 펼치기에 더할 나위없는 파트너였다. 또 모태범이 2차 레이스를 같이 펼친 제러미 워더스푼은 홈팀 캐나다의 기대주. 홈 관중들의 열렬한 워더스푼 응원은 같이 뛰는 모태범의 아드레날린도 자극해 최고의 레이스를 펼치는 원동력이 됐다. 이처럼 라이벌은 당신을 자극하면서 분발시키는 소중한 존재이다. 좋은 라이벌, 최고의 상대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리고 두 선수 모두 무명의 설움을 겪었다. 모태범은 금메달을 딴 후 “누구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은 것이 도움이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승훈도 비슷한 말을 했다. 100분의 몇 초로 승부를 가르는 경기에서 심리적인 요소는 절대적이다. 특히 올림픽 같은 최고의 무대에서는 기량 못지않게 심리적인 상태가 승부를 결정하는 일이 많다.
세계선수권에서 매번 우승하면서도 올림픽에서는 번번이 실패하는 선수들이 많은 것은 기대가 주는 중압감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두 선수는 이런 중압감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이것은 한국의 올림픽사를 다시 쓰는 쾌거로 이어졌다.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팀 메달사냥의 피날레를 장식할 것으로 기대되는 피겨스케이팅 김연아에 대해 “5,000만 한국민이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라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온 국민의 높은 기대가 김연아를 짓누를 경우 좋은 성적을 못 거둘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김연아는 “경쟁하고 이기는 것은 내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당당히 밝힌다. 신세대다운 솔직함이 드러난다. 최고의 기량을 지닌 김연아가 이번 올림픽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둘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은 그녀의 이런 배포가 든든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윤성 /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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