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여니 빨간색 글자들이 화면을 가로지르며 춤추듯 흘러간다. “꽃이 더 잘 표현합니다”
밸런타인스데이 사랑 표현에는 꽃이 제일 효과적이라는 선전문구이다.
많은 여성들의 내면이 탄산음료처럼 달뜨는 주말이다. 미혼의 젊은 여성들, 갓 결혼한 신혼의 아내들은 어떤 ‘사랑의 선물’이 당도할 지 가슴 설레고, ‘새삼 무슨 기대일까’ 싶은 중년의 여성들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지 않다.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은 변함없이 “사랑해!”이기 때문이다.
밸런타인스데이가 올해는 음력설과 겹쳐졌다. 이민1세 한인들로 보면 남의 옷 입은 듯 영 어색한 서구의 명절과 유년기부터 몸에 배어 속속들이 내것같은 전통명절이 만난 셈이다. 2월14일을 그중 어떤 날로 기념할 지는 대개 연령이 가른다. 젊은 세대는 장미와 초컬릿을 준비하고 나이든 세대는 떡국 준비를 한다. 젊은 세대는 남성이 바쁘고, 나이든 세대는 여성이 바쁘다.
“사랑과 고통, 돈은 숨길 수가 없다”는 스페인 속담이 있다. 고통과 돈을 감추기도 쉽지 않지만 특히 사랑은 숨기기 어렵다. 어느 날 사랑의 씨앗 하나 가슴에 날아들면 저도 모르게 쑥쑥 자라며 줄기 뻗고 꽃피워서 내밀하게 가두어 둘 수가 없다.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는 이 시기 사랑은 곧 ‘표현’이다. 핑계가 없어 사랑 표현을 못 하니 밸런타인스데이는 고맙고도 고마운 명절이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써버린 시간” <생텍쥐베리 ‘어린 왕자’ 중에서> - 시간 들이고 공 들이면서 사랑은 무르익는다.
10여년 전 LA 카운티 미술관에서 피카소 특별전이 열렸다. 피카소의 강렬한 작품들이 압도하는 가운데 반짝 내 눈을 끈 것은 전시장 가운데 테이블에 전시된 화가의 개인적 소품들이었다.
진주알만한 염주 목걸이가 있었다. 피카소가 그의 여러 연인들 중 한 여성에게 준 목걸이였는데 수십 개 되는 알갱이 하나하나에 디자인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작은 붓을 들고 얼마나 세심하게 공을 들였을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지 상상이 되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 그래서 그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렇게 사랑의 표현이 자동적인 기간은 하지만 처음 2-3 년이다. 두 사람이 같이 지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열정은 사그라들고 정이 그 자리를 메운다. 알콩달콩 감정이 들끓는 전자가 달콤 쌉싸름한 초컬릿 같은 관계라면 후자는 육수 푹 고아 만든 떡국 같은 관계이다. 전자는 서로 다른 고유한 맛으로 설레는 관계, 후자는 오랜 세월 희로애락을 같이 겪으며 둘의 경계가 모호하게 풀어진 푸근한 관계이다.
베이컨은 그래서 아내(배우자)를 세 단계로 분류했다. 젊은 사람에게 아내(배우자)는 연인, 중년에게는 반려자, 노인에게는 간호인이라고 했다. 밸런타인스데이도 이런 단계들에 맞게 기념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다. 밸런타인스데이가 어느 날인지도 모르고, 안다 한들 쑥스러워서 꽃 한 송이 못 사는 ‘토종 한국남편’ 때문에 열 받고 섭섭해 할 일이 아니다.
결혼 10년 가까이 되는 남자후배는 매년 밸런타인스데이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밸런타인스데이, 아내 생일, 결혼기념일을 한번도 잊지 않고 챙겼어요. 그런데 솔직히 부담스러워요. 왜 남자는 선물하고 여자는 받기만 해야 하는 거지요?”
그런가 하면 중년의 남자동료들은 결혼기념일을 깜빡했다가 혼쭐이 난 경험, 아내의 생일을 그날 오후에 겨우 기억해서 가까스로‘위기’를 모면한 경험들을 털어놓는다.
그렇다면 한인 여성들이 집안에서 여왕처럼 떠받들어 모셔지고 있다는 말인가. 꼭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밸런타인스데이와 겹친 설은 한국에서 명절증후군의 날이기도 하다. 부부 맞벌이 현실에도 불구, 부엌일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어서 주부들은 명절이 괴롭다.
여성이 집안일을 도맡고, 그런 아내에게 남편이 ‘고맙다’며 선물을 사주는 전통은 모두 지나간 시대의 산물이다. 부부가 공히 밖에 나가 돈을 버는 시대에는 가사도 분담하고, 선물도 같이 하는 것이 공평하다.
배우자가 더 이상 ‘연인’이 아니라 ‘반려자’라면 밸런타인스데이 전통도 좀 바꿨으면 한다. 여성들은 남편이 들고 올 꽃다발에 연연하지 말자. 오랜 세월 갖은 풍파 견디며 지켜온 관계를 부부가 같이 축하하는 기회로 삼자.
권정희 /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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