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다시 내린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차들. 쏟아지는 빗속에 나무들은 초록빛 춤을 추고 앞산의 정상에는 하얀 눈이 쌓였다.
“비가 오니까 너무 좋지요?”라는 나의 우문에 자동차 정비소를 하는 친구는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본다. 그러잖아도 손님이 없는데 비가 오니까 더욱 없네요 한다. 마치 어떤 망령처럼 불경기라는 현실이 친구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
“행여 내 울부짖은 들 뉘라 천사들의 계열에서 날 들으리?/ 하물며 어느 천사가 있어 불현듯 나를 가슴에 안아준다 한들/ 보다 강한 그 존재에 눌려 내사 꺼져 버릴 것만 같아라/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이란 언제고 우리가 정작 견디고 있는 두려움의 시초밖엔 아무 것도 아니려니…” <릴케 ‘두이노의 비가’>
삶 - 문화적 행위 - 은 사람의 마음을 만나는 일이다. 17세에 처음 ‘두이노의 비가’를 읽어 핏속에 그 시들이 흐르는 듯한 친구 화가 유영준은 ‘비가’의 번역이 70년대와 60년대가 얼마나 다른가를 섬세히 밝히며 읽어준다.
두이노 성에 릴케를 기거하게 하고 한 세기의 가장 탁월한 시를 탄생케 한 마리 폰 투른 운트 탁시스 오안로에 후작 부인은 어떤 여인이었을까. 두이노 성으로 향하던 밤의 동행에서 두 영혼이 나눈 침묵의 깊이를 상상해 보곤 한다.
겨울비는 창밖으로 쏟아지는데, 시를 읽어주는 친구의 다정한 목소리… 이 목소리는 내게 영원히 소중하다.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알 수도 없는 희망에 불타오르다가도 도대체 왜 그리는가 라는 근원적 질문에 다시 고꾸라지는 겨울, 한 시대에 예술가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라는 질문이 끝없이 내가 다시 확인하는 질문이다.
존재의 근원 깊이로 들어가고 비바람 속에 시신(詩神)의 목소리를 듣고, 친구들의 근심어린 모습 속에 가장 따뜻한 가슴을 만나고,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가장 순결한 기쁨을 만나고, 거부와 부정의 거리에서 삶의 충만한 실체를 확인하고, 고통스러운 모든 것이 삶의 격렬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난 알고 있지만 나의 확실한 삶의 지표 중의 하나는 절대로 미치지 않는 것과 자살하지 않는 것이다. 때로 예술계의 모든 친구들과 함께 ‘광인의 배’를 타고 망망한 바다에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LA 아트페어 - 이런 싸구려 시장판에 작업을 걸려고 내가 온 생을 바쳐 작업을 하는 건 아냐”라고 친구는 정직하게 말했다. 빗속에 트럭을 몰고 그림을 실어 나르며 한 화랑에서 이우환의 부서진 가랑잎 같이 맥없는, 소위 동양적 관념의 유희를 바라보았다.
동양성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보여줄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오해의 여지, 즉 생명력이 결여된 관념적 유희, 최초의 생생한 붓질이 계속해서 몇 10년 일어나는 맥 빠진 느낌이 불러일으키는 진부한 동양성에 대한 우려가 느껴졌다. 그리고 화랑 가에 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예술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동시대인들의 마음에 상응하는 진정한 예술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캄캄한 비오는 밤, 우연히 학교 교정을 지나다가 홀로 발레를 연습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았어요. 난 예술을 잘 모르지만 아마 저런 광경이 주는 숨죽이도록 놀라운 아름다움의 느낌이 예술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순순한 한 친구의 얘기를 기억하자 마음이 아파지며 한 화가의 작품 제목이 생각났다. 그는 캔버스 위에 ‘Avenue of Disgust’라고 썼다. 한 선배에게 물었다.
“형, 에드 러샤의 ‘Avenue of Disgust’는 한국말 번역을 어떻게 해야 하지요?… 배신의 거리가 아닐까? 난 화랑 가에서 자꾸 구역이 치밀어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감성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꼭 같다. 정직하게 말해본다면 우린 진땀을 흘리고 있다. 저 깊이에 삶의 두려움과 찬탄이 함께하는 ‘교황의 비명’<사진>을 그린 그림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공포와 분노를 내면에서 종식시킨 사람만이 진정으로 다정한 사람이야… 자꾸 구토증이 난다는 나를 꿰뚫어보며 형은 다정히 말한다. 겨울비가 선사한 흰 눈 내린 산이 ‘천사들의 도시’(Los Angeles)를 내려다보고 있다.
박혜숙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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