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한 달은 내가 사는 LA 지역에서 발생하여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적인 불난리로 기록될 것이다.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 온갖 것들과 온갖 기름이 한꺼번에 타면서 내는 불탄 냄새는 모닥불이 내는 따뜻하고 포근한 냄새와 다르다. 8살쯤에 불난리를 크게 겪은 나는 지금도 불탄 냄새를 맡을 때마다 마치 시간 여행하듯 그 때 그 순간에 서 있다.
나는 추운 밤 언덕 위에서 멀찌감치 훨훨 타고 있는 건물을 보고 있다. 우리 집, 대왕 코너다. 청량리역 근처에 있던 대왕 코너는 7층짜리 주상복합건물이었다. 주상복합이라고 했지만 5층만 아파트였고, 나머지는 모두 상가였으니 상가 건물에 아파트 층이 하나 끼어있는 셈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야 집에 갈 수 있었던 나는 대문을 열면 마당이 있는 집에 사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아파트 층 보다 아래에 있는 층에는 평범한 상점들이 있었고, 아파트 층보다 윗층인 6층과 7층은 호텔과 캬바레였다. 일반 상점과 유흥 상점을 구분하는 층이 바로 5층의 아파트 층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을 키우기에 딱히 건전한 환경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바로 그 캬바레에서 불이 나서 건물 전체로 번지고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불자동차가 달려오고 불을 끄기 위해 고가 사다리차가 동원되었다. 5층 아파트에 살던 몇몇 집은 서로 오가며 친했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가족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 두 명이 있는 집이었다. 가족 중에도 친척 중에도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나는 이 이웃집 언니들을 특별히 따랐다. 불길에 휩싸인 우리 집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언니 등에 업혀서 가던 기억이다.
컴컴한 밤길을 하염없이 걷던 언니의 등에 업혀있던 나는 조금씩 점점 미끄러져 내려가는 자신을 느꼈다. 언니라고 해봤자 중학생이었을 텐데 내가 무거웠을 것이다. 나는 무거운 내가 미안해서 다리에 힘을 주고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려고 노력했다. “힘 빼. 힘 빼고 그냥 있어.” 언니의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들린다.
모두 타버린 다른 층과는 달리 아파트 층은 어떤 집은 타고 어떤 집은 무사했다. 우리집은 무사했지만, 가재도구와 옷가지에서는 불탄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남아있던 우리들은 캬바레에서 춤추다 죽은 귀신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놀았다. 걸핏하면 정전되었기 때문에 깜깜한 방에서 모여 놀기에는 딱 맞았다.
대왕 코너에서는 그다음 해에도 불이 났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드디어 대왕 코너를 떠나 이사하였다. 귀신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놀던 우리들도 뿔뿔이 헤어졌다. 하지만 이사한 다음에도 불에 그을린 냄새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나도 냄새는 남아있을 만큼 끈질겼다. 50년 전 이야기다.
2025년 새해 인사를 나누면서 새해 결심을 만들고 새 학기를 기다리면서 시작된 큰불은 거의 한 달이 되어간다. 우리 집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딸아이의 친구들, 선생님들, 남편의 직장 동료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이번 불에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이다. 원상 복구하려면 앞으로 한 세대는 지나야 할 것이다. 원상 복구하려는 의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수요와 공급의 시장 원리를 내세우며 월세를 두세 배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적인 불난리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다. 돈이라도 물건이라도 조금이라도 돕자. 각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그날 밤 나를 업고 언덕길을 오르내린 언니는 소식이 끊긴 지 오래지만 오늘 이 지면을 통해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한 번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은 것 같아서다. 언니, 그날 나를 업고 밤길을 걸으면서 많이 힘들었지요?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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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UC 리버사이드 교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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