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주어진 조건 속에서 생을 시작한다. 부모, 형제, 피부색, 인종, 지능 등이 모두 주어진 조건이다.
국가 지도자도 주어진 조건을 가지고 국정을 시작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유명한 선거 슬로건 ‘하면 된다’ 도 주어진 미국의 정치체제 내에서 가능한 일이다.
미국이 200년 넘게 지켜오는 헌법, 삼권분립, 연방제, 관료제, 이해집단, 자본주의 체제 등은 극단의 국가 위기 때를 제외하고는 어떤 지도자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정치 인프라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 인프라 구성 요소의 역동적인 함수관계 안에서 얼마나 자기 비전에 맞는 타협을 끌어내느냐에 따라 대통령의 역량이 평가된다.
새 대통령은 신선한 정치 분위기, 새로운 정부 방향 설정으로 정치 인프라 작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오바마의 경우에는 흑인 대통령 탄생 자체로 정치 분위기를 일시에 쇄신하였다. 음악에 비유하면 버락과 미셸 오바마 부부는 텍사스 출신 부시 부부의 카우보이와 컨트리 뮤직의 분위기를 재즈와 블루스로 바꾸어 놓았다.
재즈와 블루스의 근원은 미국 흑인들의 현실에 대한 한과 탈출에의 염원에 있다. 이것을 연주자가 즉흥적 창의력과 풍부한 감정으로 표현해 음악을 만들어낸다. 서양 음악의 형식과 규율을 벗어나 재즈와 블루스는 자발적 창의성과 자유를 상징한다.
버락 오바마는 흑인뿐 아니라 탈 기존질서를 갈구하는 모든 계층들을 규합함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렇게 일구어 놓은 힘이 아직도 오바마 정부의 지지기반을 이루고 있다.
새 지도자는 새로운 비전으로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오바마는 핵무기 없는 세상, 인권의 나라로 다시 태어나는 미국, 중동 평화, 평등한 사회추구를 내세웠다. 문제는 비전을 정책에 반영시키는 일이다. 여기에서 오바마는 정치체제의 덫에 걸려 많은 고초를 겪고 있다.
경제 정책을 보자. 금융위기가 몰고 온 경제침체 해결책으로 부실은행 지원, 경기부양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실업률, 기업파산, 은행 폐쇄는 계속 상승하고 있다. 반면 월가의 금융계는 평균 50만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할 수 있는 번창을 누리고 있다.
이것은 월가 금융계가 대마불사의 논리로 정부에서 막대한 지원금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결과다. 정부는 채권자로서의 권리를 별로 행사도 못하고 있다. 미국 정치의 골 깊은 정경유착을 오바마도 어쩔 수가 없다.
건강 의료보험 개혁을 보자. 민주당의 정치이념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다양한 이념을 지닌 민주당 의원들과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의료 보험업계와의 타협에서 도출될 최종 의료 보험 법안은 이빨 빠진 호랑이 격이 되고 말 것이다. 틀과 형식은 갖추었으나 내용은 부실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상을 목표로 하다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안주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나마 전임자들은 못 해낸 것이다. 오바마와 민주당의 지구력으로 만들어질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외교안보 테러척결 정책에서도 정치체제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6월4일 오바마는 이집트 카이로 대학 강당에서 이슬람 국가들과의 새로운 시작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지만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타협안은 별 진전을 못 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미군증파 결정을 내렸고 이라크에서의 철수도 늦어지고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이슈에도 별로 손을 못 쓰고 있다. 중동평화 문제와 알카에다 테러 이슈는 이스라엘의 이해 와 미국 내 유대인 파워와 직결되어 있다. 이스라엘 비호가 미국외교 정책의 철칙으로 남아 있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요원하다.
북한 핵 이슈는 오바마 행정부의 우선순위에 있지 않다.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 체결도 요원하다. 국내 지역경제 임팩트에 민감한 미국 의회는 개방보다 무역 보호주의로 나가고 있다. 2000년 이후 미 의회가 자유무역협정을 인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바마의 임기는 아직도 3년이 남았다. 오바마 대통령의 남은 임기에 더 기대를 해보자.
차만재 / 칼스테이트 프레스노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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