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보 국토 종단기 <32> 속초 지나 고성으로
속초항 지척에 속초 수복을 기념하여 세운 ‘수복기념탑’이 서있다. 보따리를 끼고 있는 어머니와 북녘하늘을 가리키는 어린 아들이 함께 손을 잡고 고향땅을 바라보는 동상이다. 언제라도 고향을 향해 달려가겠다는 실향민의 애절한 한과 통일 염원이 담겨있는 분단의 상징물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났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은 치유되지 못하고 분단된 조국은 지금도 갈라진 채로다. 모자상 앞에 섰다. 고향을 떠나 30년 가까운 세월을 외국에서 살다 온 나그네의 심정이 착잡하다. 고성군 입구에 들어선다. 대한민국 북쪽 끝에 해당하는 유일한 분단 군이다. 통일 전망대도 고성군에 속한다. 내일, 늦어도 모레까지면 종단을 마무리하게 된다. 처음 시작할 때 까마득하던 목적지가 어느새 코앞에 다가왔다.
속초항 지척에 분단의 상징물 ‘수복 기념탑’
고성팔경 청간정 거쳐 송지호 시원한 바람 솔솔
발걸음을 재촉한다. 휴전선 가까운 곳에 위치한 때문인지 걸어가면서 보니 군과 관계된 건물들이 많이 보인다. 배낭이 제법 묵직하다. 아침에 민박집 아주머니가 담아준 고구마와 떡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길가 마켓이 보이기에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 아침에 민박집 아주머니가 싸주셨는데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으니 함께 드시겠느냐고 물었더니 반긴다. 먹고도 또 남아 고구마랑 떡을 주인아주머니께 드렸다. 민박집 아주머니 손이 참 크기도 하다. 배낭이 훨씬 가벼워졌다.
길가에서 고사리를 따러 온 아저씨를 만났다. 봄이면 고사리를 꺾어 용돈으로 쓴다고 했다. 한 관에 3만5,000원정도 받는데 오늘 밥값은 했다고 웃는다. 마침 무논에 못자리를 돌보러 나온 어른이 보이기에 “농사일이 힘드시죠?” 하고 말을 건넸더니, “깐깐오월에 미끈유월이요. 어정칠월에 건들팔월이라. 그렇게 또 한 세상 가는 거지, 뭐 별 게 있나요?” 하고 시원스럽게 대답하신다. 농부를 바라보는 고사리아저씨의 표정에 부러움이 가득하다.
고성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을 거쳐 강원 해양심층수 연구센터를 지나 송지호 철새관광타워에 이르렀다. 호수가 맑다. 산이 물속으로 내려와 발을 씻고 있다. 나도 잔디 위에 다리를 펴고 앉아 시 한편을 읽는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 한다 //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 한다 //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 한다 // .... 류시화가 쓴 ‘길 위에서의 생각’이다.
고성읍 9킬로 지점. 커브 길을 걷는데 저편에서 승용차 한 대가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차가 좀 흔들린다. 운전자가 졸고 있나? 순간 눈이 마주쳤다. 어, 어! 하는 사이 내 옷깃을 아슬아슬 스쳐 지나간다. “저런, 야, 야 임마!” 도망쳐버린 녀석에게 소리쳐 보았자 무슨 소용인가.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고를 당할 뻔 했다. 이렇게 위험했던 순간이 벌써 세 번째다. 전남 강진에서 바람에 쓸려 차에 부딪칠 뻔 했던 일, 비오는 날 강원도 평창 진부 고개를 넘으며 대형트럭에 치일 뻔한 일, 그리고 오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국토종단을 해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빈 들을 걸으면서 다시 깨닫는다. 어렵더라도, 위험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라면 피하지 마라. 한 바탕 인생이다.
마을이 보인다. 연기가 올라간다. 저녁을 짓는 모양이다. 연기가 지붕을 가만가만 감싸 안아 멀리서 보면 동네가 옅은 안개 속에 싸여있는 것처럼 아늑하고 평화롭다.
어둑 무렵 고성읍에 도착했다. 낮에 아찔했던 일이 다시 떠오른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다. 식당에 들어가 제일 맛있는 음식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생선탕이란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을 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내가 나에게 소주 한 잔을 권했다.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곳에 세워진 고찰 건봉사는 남한에서는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다. 신도들이 조선시대 때 세워진 능파교를 건너고 있다. 능파교는 한국의 보물로 지정돼 있다. <고성군 제공>
<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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