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의 본산이랄 수 있는 국무부에는 부장관이란 직책이 있다. 이 국무부 부장관의 주 업무는 그러면 무엇일까. 아마도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닐까 싶다.
뭐 다른 말이 아니다. 부시 행정부, 그리고 뒤이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이 잇달아 중국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 하는 소리다.
중국을 ‘책임 있는 당사자’(Responsible Stakeholder)로 처음 호칭한 건 로버트 졸릭 전 국무부 부장관이다. 이 말이 나온 게 2005년. 그리고 4년 후 현 국무부 부장관 제임스 스타인버그도 새로운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어냈다.
‘전략적 재확인’(Strategic Reassurance)이란 말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 중국외교 전략을 응축한 용어로, 오바마의 첫 아시아국 나들이, 특히 그 순방외교의 핵이라고 할 중국방문을 맞아 그 의미와 방향성을 둘러싸고 새삼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미국의 중국정책은 지난 수 십 년간 두 가지 상호보완요소를 지녀왔다. 하나는 포용이다. 다른 하나는 견제다.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을 국제무역기구(WTO)에 가입시켰다. 동시에 일본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했다. 부시 행정부는 중국과의 보다 밀접한 경제관계를 통해 전략적 협력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그러나 동시에 인도, 일본, 싱가포르, 베트남 등과의 전략적 관계를 강화했다.
이 전략은 다른 게 아니다. 포용을 통해 중국을 평화유지의 당사자로 끌어들인다. 그러면서 견제를 통해 힘의 균형을 민주체제 동맹국들과 미국의 이해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전략적 재확인’은 그런데 전혀 다른 코스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전략적 재확인’ 정책은 19세기 말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던 미국에 대한 영국의 외교 전략과 비교될 수 있다. 서반구, 다시 말해 미주대륙 전체를 미국의 세력권으로 간주, 영국은 이 지역에서 스스로 간섭을 배제한 전략을 꽤나 닮은 것이다.
이 전략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 논란은 뒤로 미루고 여기서 한 주 전으로 얘기를 돌린다.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이 되는 날 과거 동서냉전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나라의 수뇌들이 베를린에 모였다. 프랑스 대통령, 영국 총리 등등. 미국 대통령만 참석하지 않았다.
대통령 후보시절 오바마가 효과적 유세를 위해 찾은 곳이 베를린이었다. 냉전시절 존 F 케네디가 베를린을 방문했던 것을 카피하듯이 그 자리에서 자유를, 변화를 외쳤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 20주년의 날에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베를린 장벽붕괴 20주년 기념은 단순한 냉전승리의 자리가 아니다. 베를린 장벽은 악의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인간의 존엄성과 진실을 짓밟고 힘만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외면한 것이다. 왜. 추측은 여러 갈래다. 그 중의 하나가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대통령도 그 행사에 참석했다.
그 자체로 오바마 외교정책은 신뢰성을 잃었다는 게 한 쪽에서의 주장이다. “오바마 외교정책은 미국의 적(敵)에게는 안정감을 주고 우방에게는 불안감을 안긴다.” 이코노미스트의 지적이다.
오바마는 어느 날 갑자기 폴란드, 체코 등 새로운 우방에 등을 돌렸다. 러시아의 환심을 사기위해 동유럽 미사일방어기지건설을 백지화 한 사실을 이 잡지는 새삼 환기시킨 것이다.
그 오바마 행정부가 ‘전략적 재확인’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었다. 그러니 적지 않은 아시아 국가들이 벌써부터 상당한 동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정책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종의 ‘딜’(deal)에 나선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서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중국에게 ‘프리 라이드’(free ride)를 주고 있다. 중국이 군사력을 계속 증강하는 마당에 태평양지역에서 뒤로 물러날 때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지도국이 될 수 없다.” 싱가포르의 국부 이광요의 말로, ‘전략적 재확인’ 개념을 통박하고 나섰다.
불안하기는 일본도,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 개념설정이 상당히 모호해서다.
19세기말 새로 떠오르는 미국에 대한 영국의 포용전략은 잘못된 정책이 아니다. 두 나라는 가치관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 영·미 두 나라 모두 민주체제다. 이 두 민주체제는 특수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후 한 세기 동안 격랑의 세월 속에 함께 세계질서를 구축해나갔다.
민주체제인 미국과 권위주의체제인 중국이 과연 그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전략적 재확인’ 정책이 결국 실패하지 않을까 우려를 보이는 주 이유다.
‘전략적 재확인’은 그러면 한반도문제의 경우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오바마-후진타오 회담의 결과를 일단 기다려 볼 수밖에. 그러나 어딘가 감이 개운치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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