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역사에서 11월 9일은 여러모로 뜻 깊은 날이다. 1918년 11월 9일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진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선포됐다. 1923년 11월 9일에는 히틀러가 뮌헨에서 맥주를 먹다 소위 ‘맥주 홀’ 쿠데타를 감행했다 실패한다. 또1938년 11월 9일은 유대인 학살의 서곡인 ‘크리슈탈나흐트’다.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 상점 유리창이 깨지고 1,3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됐다. 히틀러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패전의 치욕을 씻기 위한 것이고 유대인 학살도 독일 패전의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는 이유로 저질러졌다는 점에서 이들 날짜는 서로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머릿속에 가장 널리 남아 있는 11월 9일은 1989년 11월 9일이다. 영원히 남아 있을 것 같던 동서 분단과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이와 함께 동구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냉전도 끝났다.
2009년 11월 9일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베를린에서 실제로 도미노를 무너뜨리는 행사가 열렸다.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고르바초프여, 이 벽을 허무시요”라고 외쳤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것이 농담인줄 알았다. 정말 2년 뒤 이 벽이 무너지리라고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으며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CIA도 KGB도 몰랐다.
도대체 이 벽은 누가 무너뜨린 것일까. 그 직접적인 공은 그날 용감하게 망치를 들고 나와 벽을 허문 베를린 시민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동독 당국이 발포를 자제했기 때문이다. 동독 당국이 발포를 자제한 것은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꾸물거리는 자는 역사의 벌을 받는다”며 개혁 대열에서 낙오하지 말 것은 경고하고 소련이 1968년 ‘프라하의 봄’ 때처럼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는 왜 무력 진압을 포기했을까. 공산주의의 모순을 직접 눈으로 본 그는 이는 무력으로 해결될 성질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레이건-대처로 요약되는 서방의 대소 강경 노선도 더 이상 군비 경쟁을 벌여봐야 이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했을 것이다. 거기다 공산 압제의 피해자인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원 아래 기세가 커진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 바츨라프 하벨로 대표되는 반체제 인사들의 활동 등등이 겹쳐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와 함께 냉전이 끝나고 수억 인류가 공산 압제에서 해방되고 평화와 번영이 시대가 올 것 같았다. 한 동안은 그렇게 되는 듯 했다. 90년대 말까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전쟁은 이제 역사 책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01년 터진 9/11 사태는 모든 것을 바꿔 놨다.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끝났지만 회교 극단주의와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작년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과 함께 전 세계를 금융 위기에 빠뜨렸던 부동산 버블이 부풀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년이 지난 지금 11/9와 9/11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역사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두 사건 모두 그 바로 전날까지 이런 사태가 가능할 것으로 점친 사람은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베를린 장벽 붕괴의 필연성을 논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고르바초프가 아니라 브레즈네프였다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을 것이다.
둘째는 “큰 지혜는 어리석어 보인다”는 옛말의 진실함이다. 80년대 폴란드의 기능공 레흐 바웬사를 비롯한 몇몇 노동자들이 자유 노조 운동을 시작했을 때만도 이것이 ‘악의 제국’ 소련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되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레이건이 공산주의 몰락을 예언했을 때 받은 것은 비웃음뿐이었다.
서양에 ‘인간이 제안하고 신이 결정한다’(Man proposes, God disposes)는 속담이 있다면 동양에는 ‘인사를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 역사를 만드는 것도 역사가 기억하는 것도 그런 사람들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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