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식 셰프들 ‘한식의 세계화’ 논하다
▶ “전통 한식에 현지 문화 옷 입혀야 성공”
#프롤로그
그들이 작정하고 입을 열었다.
올해 초부터 한국을 뜨겁게 달군 화두, ‘한식의 세계화’가 그들이 작정한 대상이다. 한식의 세계화라는 말이 민망할 만큼 세계 속 한식의 최전방이며 오랜 근거지인 LA 한인 식당 업계에서 일견 화려해 보이는 이 캐치프레이즈는 그저 슬로건이 아닌 생계의 문제이며, 사업 전략이기도 하고, 투자 대상이며, 혹자에게는 자부심이기도 하니 오죽 할 말이 많지 아니하겠는가.
다들 ‘이 바닥’에서 이름 석자 꽤나 알려진 이들인데다, 한식에 대한 애정으로 치자면 3박4일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아도 성에 차지 않을 이들이다. 그러니 ‘한식의 세계화’라는 조금은 뜬구름 잡는 주제가 될 듯도 싶어 내심 걱정했는데 웬걸. 이야기판에 이들 다섯이 작정하고 덤벼드니 밤이 맞도록 핏대 세워 이야기를 해도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식의 세계화’ 좌담회에 참석한 한식 전문가들. 왼쪽부터 김동헌 셰프, 남궁미진 대표, 제인 장 원장, 데비 리 셰프, 신혜윤 대표.
<한식의 세계화 좌담회>
일 시: 2009년 9월 25일 늦은 오후
장 소: 캘리포니아 프리미어 요리학교(CPCS)
참석자: 제인 장 원장(46·CPCS)
김동헌 셰프(43·윌셔 그랜드 호텔 서울정)
신혜윤 대표(37·컬버시티 한식당 개나리)
데비 리 셰프(39·컬버시티 한식당 개나리))
남궁미진 대표(37·마리나 델레이 한식당 화로)
진 행: 이주현 기자
사 진: 이은호 기자
이야기가 점점 깊어지면서 서로 다른 생각 차로 목청 높여 뜨거운 공방전이 전개되기도 했지만, 이 바닥을 온 몸으로 겪어 본 이들만이 갖는 끈끈한 동지애는 시간이 갈수록 깊은 공감과 연대로 바뀌어 갔다. 이들에게 한식의 세계화는 앞으로 이뤄야 할 ‘오버 더 레인보우’가 아닌 바로 지금 그들이 손 맞잡고 걸어가고 있는 척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고민과 열정이 불꽃 튀었던 이 날의 좌담회 현장을 지상 중계한다.
-사회: 한식의 세계화의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동헌: 서울정에 오는 주류사회 단골들의 숫자가 느는 것을 볼 때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다만 타인종 고객들의 입맞에 맞춰 얼마나 현지화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본다.
▲남궁미진: 마리나 델레이에서 5년째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데 요즘 조금 회의적인 생각이 들만큼 힘에 부친다. 한식이란 게 다른 나라 음식에 비해 메뉴가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데 한식을 할 수 있는 인력은 많지 않다. 한국 정부가 최근 한식의 세계화에 100억 원을 출자한다고 하는데 한식 세계화의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LA에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지 묻고 싶다.
▲김동헌: 한국 정부가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보다는 LA 한식당들의 자체적인 노력이 우선 시돼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한식 요리사들을 중심으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조직도 만들고, 한식 인력을 키워내는 데도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일본이 반세기에 걸쳐 이룬 세계화를 한국식 밀어붙이기로 10년, 20년 안에 당장 이뤄내야 한다는 과도한 욕심은 버려야 한다고 본다.
■ 제인 장
전통과 변화 아우를 2세들 의기투합 필요
■ 데비 리
타인종 고객을 위한 맛·운영 현지화 관건
■ 김동헌
한식 인력 더 키우고 음식 벤치마킹 필요
■ 남궁미진
LA는 한식 세계화 첨병 지원 앞서 의견 수렴을
■ 신혜윤
반찬 너무 많아 낭비 유료화도 검토해야
-사회:한식의 세계화에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데비 리: 요즘 타인종 고객들의 한식에 대한 인식과 취향은 놀랄 만큼 수준이 높아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한식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폭발력을 갖게 하는 것인데 이는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메뉴 판에 충분한 영어 설명을 해놓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 식당처럼 철저한 종업원 교육을 통해 이들부터 충분한 한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식당에서는 매주 2~3시간씩 교육과 테스트를 통해 이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제인 장: 바로 그 부분이 2세들이 해결해야 할 한식 세계화에 대한 숙제가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1세들이 전통한식을 현지화시켜 미국인들 입맛에 맞추는 것까지 했다면 여기에 미국식 문화를 입히는 것은 바로 2세들만이 할 수 있는 다음 단계라고 본다.
-사회: 그러나 너무 현지화와 미국 문화에만 집중하다 보면 한식 고유의 맛을 잃어 버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남궁미진: 최근 서울에 가보면 한식의 현대화랄까 세계화는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 한인들 생각엔 한식의 세계화가 LA만 하겠는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요리법은 물론 디스플레이, 메뉴판의 영문 표기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있다. 오히려 이런 한국의 변화 상을 받아들 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데비 리: 그러나 문제는 변화가 아닌 바로 현지인들 입맛에 맞느냐 아닌가 하는게 더 큰 관건이라고 본다. 아무리 현대화를 하고 퓨전 메뉴를 개발한다고 현지인들 입맛에 얼마나 맞을 것인가 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제인 장: 현재 한식 세계화의 과제가 요리법만으로 본다면 한식 전통을 바탕으로 그 위에 새로움을 가미해야 한다고 본다면 1세와 2세들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의기투합이 필요하다고 본다.
▲김동헌: 내 견해는 무조건 전통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문화와 예술이 그렇듯 그 시대와 사회상에 맞게 진보하게 마련이다. 한식엔 아보카도가 들어가면 이상하다든가 하는 편견은 오히려 그 나라 음식을 틀에 가둬 쇠퇴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본다. 지킬 기본은 지키되 얼마든 다른 나라 음식을 벤치마킹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야말로 진정한 세계화가 아니겠는가.
-사회: 현재 타인종 고객을 상대로 비즈니스를 해보니 가장 큰 애로사항은 무엇인가
▲신혜윤: 타인종 고객들이 한식에 대해 잘 알면서도 또 너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한인타운에서 한국 음식 좀 먹어본 이들이라 해도 한식이라 하면 갈비와 순두부가 전부인줄 안다는 것이고 잘 안다는 것은 최근 한인타운 무제한 고기 집을 중심으로 출혈경쟁으로 터무니없이 싼 가격을 너무나 잘 알아서 왜 이렇게 비싸냐고, 무제한 고기 메뉴는 없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남궁미진: 맞다. 원래 화로 역시 전통적인 한식을 주류사회에 선보인다는 모토 하에 오픈했지만 요 최근 한인타운 음식값을 알고 오는 이들 때문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무제한 고기 메뉴를 내놓게 됐다.
-사회: 그렇다면 한식을 보다 더 고급 메뉴로 주류사회에 안착시킬 수 있는 방법은 뭐라 생각하는가.
▲김동헌: 반찬을 없애야 한다고 본다. 한식당을 운영하는 많은 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결코 적지 않은 가짓수의 반찬 때문이다.
▲남궁미진: 맞다. 이젠 오히려 백인 고객들이 이 반찬이 무료라는 것을 알고, 심한 경우엔 요리를 시키지 않고 밥 한 공기만 시켜 먹고 이 반찬과 먹고 가는 사례도 있었다.
▲신혜윤: 게다가 매일매일 반찬을 만든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데다 일단 상에 오른 반찬은 먹지 않았어도 버리게 되므로 낭비도 심한 편이다. 미국 식당처럼 반찬을 사이드 디시처럼 판매해야 된다고 본다.
▲김동헌: 아마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라 본다. 이제 겨우 주류사회에 한식이 알려지고 있는 단계이다 보니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되는 부문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 본다.
#에필로그, 현실 가능한 청사진을 확보하라
요즘 한인타운 식당 주인 쳐놓고 한식 세계화에 대해 논문 한편씩 못 쓸 이가 없어 보일 만큼 너도나도 이 주제를 놓고 할 말들이 많아 보인다.
이들 ‘논문’ 속 공통점은 한결 같다. 한국 내에서 세계화도 좋지만 세계 최대 한인 거주지역인 LA야말로 한식 세계화의 최적지라는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선 한식 세계화에 있어 한국보다 LA가 실효성 면이든 가시적 성과면 이든 훨씬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한국 정부가 모를 리 없을 터. 요 최근 한인 식당가와 웨스트LA 인근 한식당들을 대상으로 한국정부는 민간기관을 통해 몇 차례 실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이 달 중순엔 한식당 셰프들을 모아 한국에서 파견된 전문인력이 전문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다.
그러나 한인 업주들 중 상당수는 한국 정부의 이 ‘한식 세계화’ 추진이 너무 뜬구름 잡는 게 아닌가 하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한국 정부 입장에선 한식의 세계화라는게 한국 음식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그 목적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식당 경영자 입장에선 무엇보다 이윤이 담보된 뒤 이야기라는 것이다. 즉 아직까지 미국인들에게 코리안 푸드라 하면 바비큐가 전부인 것으로 아는데 여기에 전통 한정식만을 고집한다면 어떤 식당 업주에게 공감을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전통문화 계승이라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애국심에 호소하는 논리보다는 현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한 맞춤 지원방안을 내오고, 한국의 우수한 한식 인력 파견이라든가, 안정적인 한식 교육 제공과 같은 보다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지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차피 한국정부가 LA 한식당들을 지원하기로 나섰다면 탁상공론이 아닌 보다 더 광범위하면서도 공개적인 실사와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매스터 플랜을 이곳 식당 관계자들에게 설명하고 공감을 얻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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