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가을 시카고에서 내과학회에 참석한 후 남가주 집으로 오던 길이었다. 급히 다녀오느라고 허겁지겁 비행기를 타고 맨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숨을 돌렸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피로가 몰려와 눈을 살짝 붙였는데 기내방송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의료인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나는 실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약간 소란이 있더니 한두 명이 나가는 것 같았다. 잘 됐다 싶었다. 어떤 문제건 치료하기에 열악한 상황에서 공연히 끼어들었다가 혹시라도 의료책임 분쟁에 말려드는 것을 나는 원치 않았다. “별 문제가 아닐 거야” 위로하면서 다시 자려고 하는데 다급한 소리로 방송이 다시 나온다.
“의사가 있으면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원치 않는 마음이었지만 모른체 하기도 불편해서 어기적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앞 쪽에 백인 부모들 무릎 위에 초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여아가 축 늘어져 있었다. 호흡은 가늘고 눈은 뒤집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일 났구나”하며 잠은 확 달아나고 내 가슴은 덜컹 떨어졌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물었다.
“예, 딸아이는 당뇨가 있습니다. 아침에 주사도 잘 맞았습니다”
나는 직감적으로, “저혈당 쇼크일 겁니다”하고 아이의 부모에게 외쳤다. 비행기 승무원에게 부탁해 비상용 산소마스크를 여아의 입에 갖다 대게 하였다. 당뇨 측정기로 당을 재어보니 저혈당이 확인되었다. 승무원이 기내 응급조치 백을 가져와 황급히 열어보니 새 혈압계는 조립도 되어 있지 않았고, 정맥 포도당 주사액은 있어도 혈관주사를 꼽을 바늘이 없었다.
몇 분이 흐르며 환자는 상황이 더 나빠지고 의식을 잃으며 발작을 한다. 번뜩 내 머릿속에 커피 탈 때 쓰는 가루설탕이 떠올랐다. 악어 턱과 같이 단단히 닫혀 있는 여아의 입을 겨우 벌려 혀 밑으로 설탕을 털어 넣었다. 혀 밑에서 약이 빨리 흡수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금방 아이의 호흡이 조금 안정되고 의식이 돌아오는 게 아닌가. 나는 다시 가루설탕을 조금 더 혀 밑으로 넣어주었다. 혈당치는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아는 희미하나마 의식을 찾고 물을 조금씩 마셔도 될 정도가 되었다. 여아에게 오렌지주스와 세븐업을 아주 조금씩 마시게 하였다.
승무원과 기장이 내게 물었다.
“남가주에 도착하려면 몇시간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 가까운 도시로 비상착륙을 할까요?”
나는 순간 고민했다. 책임을 빨리 면하려면 비상착륙해서 환자를 근처 병원으로 보내는 것이 상책이지만, 환자의 집이 남가주 미션비에호라는 점, 많은 탑승객이 겪을 불편, 또 호전되고 있는 환자의 상태를 고려할 때 그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아닙니다. 제가 옆자리에 앉아서 계속 지켜볼 테니 계속 비행을 합시다”
기장과 승무원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나의 단호한 태도에 따라 계속 남가주로 가기로 했다. 승무원들은 책임 소재를 위해서였는지 나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기록했다. 나는 중간 중간 환자의 상태가 잘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했고 오렌지카운티 공항에 대기시켜 놓았던 앰뷸런스에 환자를 실려 보내고 나서 안도했다.
그 후 환자 가족들에게서 여아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과 함께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 그 때의 기쁨은 망설임의 난처함보다도 훨씬 컸다. 후에 나는 항공사에 편지를 썼다.
“응급조치 백에 들어 있어야 할 모든 항목이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혈압계는 미리 조립해서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있다 날아온 답장에는 사과문과 비행기 표가 들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한 의도로 환자를 도와주다가 결과가 안 좋으면 주법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있다. 다행히도 많은 주에서는 도움을 준 의료인을 결과와 관계없이 보호해 주는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 제정되어 있단다.
비행기를 타고 갈 때는 그 비행기가 지나는 주의 법에 따라야 된다고 하니, 내가 그 여아를 도왔던 당시 비행기는 어느 주를 지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비록 보호법이 없는 지역이라 해도 다시 응급상황이 벌어진다면 이번에는 기쁘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리라 다짐해 본다.
김홍식 /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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