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그날인가. 그날이 어떤 날인지 정녕 몰랐단 말인가. 워싱턴 사람들 중 아무도 그날이 어떤 날인지 몰랐다면, 혹은 알고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면 바로 그것이 진짜 문제가 아닐까.
이코노미스트지의 지적이다. 그날은 9월17일이다. 폴란드인들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바로 9월17일이다. 한국인들이 6월25일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처럼.나치독일과 공산소련이 비밀협정을 맺었다. 폴란드를 침공해 양분하자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협정이다. 그 협정에 따라 1939년 9월17일 소련은 폴란드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그 ‘악몽의 날’ 70주년이 되는 2009년 9월17일 폴란드는 워싱턴으로부터 일방적 통보를 받았다. 체코와 함께. ‘동유럽 미사일방어계획’(MD)을 폐기하겠다는 통보다.
엄청난 정치적 위험을 감수했다. 러시아의 노골적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얻어낸 게 동유럽 MD계획에 따른 미국의 공약이다. 폴란드에는 요격미사일기지를, 체코에는 레이더기지를 건설해 이란의 장거리미사일에 대비하기로 한 것이다.
항상 러시아의 위협에 시달려왔다. 강대국의 이해 다툼에 희생이 돼왔던 것이다. 지난해 8월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은 그 악몽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뭔가 위험을 감지했다. 그래서 바라본 것이 미국이고, 서둘러 협정을 맺은 것이다.
폴란드와 체코 두 나라가 동유럽MD계획에 적극 참여한 의도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미국의 공약을 끌어내 안보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그 방침에 따라 미국의 충실한 맹방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하고 러시아의 천연개스 공급 중단에도 버티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일방적인 공약 철폐다. 부시 전 대통령이 제안한 이 계획을 오바마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철회한 것이다. 그 철회 결정이 내려진 날도 그렇다. 소련의 폴란드 침공 70주년이 되는 날로, 무신경도 그런 무신경이 없다.
“미국이 앞으로 어떤 요청을 해오든 반대할 것이다.” 한 보수파 체코 국회의원의 말이다. “미국은 우리의 등을 찔렀다. 러시아에 팔아넘겼다.” 폴란드에서 나오는 반응이다. 미국의 배신에 치를 떨고 있는 것이다.
왜 오바마는 동유럽MD를 철회했나. 새로운 정보 분석에 따르면 이란의 장거리 미사일 위협이 감소됐다고 한다. 때문에 지상 미사일 방어체계는 효과적이 되지 못해 중거리 미사일에 대비하는 해상 방어체계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순수한 군사적 견지에서 볼 때 그 논리는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러나 전략적 측면으로, 이번 결정은 자칫 재난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다.
우크라이나가 동요하고 있다. 그루지야는 또 한 차례 러시아의 침공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 과거 러시아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 공산소련붕괴와 함께 친(親)서방으로 돌아선 신생 민주체제들이 생각을 달리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핵 방어우산정책도 그렇다. ‘우리가 나서서 핵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그러니 자체 핵 개발을 하지 말라’-미국 핵우산정책의 골자다. 그 미국이 어느 날 돌연히 공약을 철회했다. 그 미국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많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을 수 있는 것이다. 미국에 기대기보다는 자체의 핵을 개발한.
왜 그런데도 그 같은 결정을 내렸나. 재차 던져지는 질문이다. 이란 핵개발 저지를 위해 러시아로부터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다. 이어지는 관측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못된 계산일 수 있다.
핵 개발, 더 나가 핵 무장 이란이 결코 나쁠 게 없다. 러시아의 입장이다. 그런 이란의 존재는 석유가 앙등을 불러온다. 또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러시아의 주가를 높여준다. 이란 제재를 미끼로 서방으로부터 얼마든지 양보를 얻어 낼 수 있으니까.
그런 러시아가 이란 제재에 적극적 협조를 아끼지 않는다. 이야말로 착각이라는 거다. 말하자면 러시아의 협조를 얻기 위해 맹방을 버린다는 그 논리가 위태롭기 짝이 없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친구가 되는데 있어 문제는 언제 미국이 스스로 발등에 대고 총을 쏠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중동문제 석학 버나드 루이스의 경구를 인용한 월 스트리트 저널의 보도다. 반(反)미, 아니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들과의 유화책의 일환으로 친구를 저버리는 오바마 외교를 비꼰 것이다.
그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과의 2자 회담에 곧 나선다. 그 회담에서는 스스로 발등에 총을 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까. 그 점이 걱정된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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