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인생 상담코너인 ‘디어 애비’에서 읽은 이야기로 기억된다. 어느 부부가 결혼 25주년을 맞아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잔뜩 초대해 파티를 잘 하고는 파티 끝 무렵 부부가 “발표할 것이 있다”고 했다.
들뜬 분위기 속에서 웃고 떠들던 참석자들은 “둘이 기념여행이라도 떠나려나?”하며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발표 내용은 뜻밖이었다. 부부가 이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결혼해서 25년 동안 같이 살며 아이들 다 키워 내보냈으니 이제는 이혼해서 각자 따로 살겠다는 발표였다.
결혼 25주년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던 당시 나는 “25년이나 같이 산 부부가 왜 헤어지나, 그냥 살지…”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일종의 ‘빈 둥지 증후군’이었다. 자녀들이 대학이나 직장을 따라 집을 떠나고 나면, 그래서 부부가 텅 빈 ‘둥지’에 단둘이 남게 되면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과정이 있다. 부부사이의 관계가 시험대 위에 오르는 것이다.
‘빈 둥지 증후군’의 계절이 돌아왔다. 대학 신입생 부모들이 자동차 가득 바리바리 실은 짐을 아이와 함께 대학 기숙사에 내려놓고는 텅 빈 가슴으로 텅 빈 자동차를 몰고 돌아오는 계절이다. 아이는 “드디어 대학생이다. 드디어 자유다”며 신나서 친구들과 인사 나누느라 정신이 없고, “이제는 정말 이별이구나” 싶어 분위기 잡고 작별인사라도 나누고 싶었던 부모는 그런 아이가 서운해서 두 배로 가슴이 아리다.
미국에서 ‘빈 둥지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970년 즈음이었다. 자녀들이 성장해 집을 떠난 후 부모, 특히 엄마들이 그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심한 우울증에 빠지는 현상이 주목을 받으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녀가 두셋이면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여년. 그 세월동안 엄마들의 삶은 자녀를 중심으로 자전하고 공전한다. 매일 매일의 일과가 자녀의 학교 스케줄과 특별활동을 중심으로 짜이기를 20여년 반복하다 보면 ‘엄마’ 아닌 다른 삶은 상상하기도 어려워진다.
‘빈 둥지’는 그런 대상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충격. 엄마들, 특히 전업주부들은 길을 잃은 느낌이 되고 정체성의 혼란까지 느낀다. “돌볼 아이가 없다면 나는 엄마인가, 엄마가 아니라면 나는 뭔가”하는 혼란이다.
자녀가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올라가듯 부모도 인생의 다른 단계들을 살아간다. ‘빈 둥지’는 부부가 자녀를 낳고 기르는데 모든 시간과 돈, 정력을 쏟던 시기를 졸업하고 인생의 새로운 무대로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무대의 특징은 배우가 단 둘, 부부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대의 성공 여부는 오로지 배우들에 달려있다. 배우가 호흡이 잘 맞으면 ‘제2의 신혼기’가 될 수 있고, 호흡이 안 맞으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자녀가 접착제 역할을 했던 사이, 자녀 때문에 참고 버텨온 부부는 이 무대에서 갈등이 더 적나라하게 드려나곤 한다. 그래서 위의 결혼 25주년 부부처럼 아예 갈라서는 경우도 생긴다.
자녀들이 떠나고 부부가 단둘이 남으면 보통 두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서로 할 말이 없다는 것 그리고 자주 싸운다는 것이다. 지난해 막내를 대학에 보낸 후 한 주부가 말했었다.
“저녁에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앉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저 묵묵히 밥 먹고, TV 보고 하는 게 전부예요”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주부는 남편과 무척 싸우게 되더라고 했다.
“전에는 아이들한테 신경 쓰느라 못 보던 것들이 모두 눈에 들어와요. 물 마신 컵 아무데나 두는 것부터 신문 늘어놓는 것까지 사소한 것들로 사사건건 부딪치고 말싸움을 하게 되네요”
두 경우 모두 원인은 같다. 부부가 자녀에게만 너무 초점을 맞추다보니 정작 서로에 대해서는 낯선 사람들이 되고만 결과이다. 이런 ‘빈 둥지’ 부부들을 위한 웍샵과 세미나가 지금 미국에서 유행이다. 전문가들은 부부가 서로를 새롭게 알아가는 노력을 할 것, 뭔가 같이 즐길 취미활동을 계발할 것을 추천한다.
‘빈 둥지’는 상실이 아니라 축복이다. 자녀양육의 의무를 잘 끝내고 받는 상이다. 연애시절의 싱그러운 열정을 되찾는 것, 그렇게 처음처럼 다시 둘이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빈 둥지’ 삶의 지혜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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