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건가” 싶은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그런 회의가 스멀스멀 의식의 저변을 맴돌기도 하고, 뭔가 돌파구가 없으면 그대로 폭발해버릴 것 같은 절박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두 경우 모두 이어지는 질문은 같다 - “그렇다면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할까”
요즘 주변에서 ‘앞으로 할 일’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앞날 창창한 젊은 세대의 진로 걱정이 아니라 살만큼 산 중년층의 남은 생애 걱정이다.
이전 세대의 삶은 단순한 데가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면 그 직장을 기반으로 평생을 살고, 은퇴하면 조용히 몇 년 살다 생을 마감했다. 사회보장연금이 만들어졌던 20세기 중반 65세를 은퇴 연령으로 잡았던 것은 평균 수명이 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60대 중반에 은퇴하고 나면 보통 20년은 거뜬히 산다. 평생직장 전통은 사라지고 수명은 길어졌으니 중년층의 ‘할 일’ 걱정은 심각하다. 특히 지난 1년 직장마다 감원 바람이 불면서 걱정은 발등의 불이 되었다. “언제까지 장기판의 말처럼 이리 가라하면 이리 가고, 그만두라 하면 그만 둬야 하나” “내가 내 인생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일은 뭘까” - 고민들은 깊어만 간다. 인생에서 이제 ‘이모작’은 필연이 되었다.
주위에 ‘이모작’에 성공한 사람들이 몇 명 있다. 그들에게 비결을 물어보면 앞뒤 안 가리는 열정, 무모하다 싶은 결단이필수다. 이것저것 따지다가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50이 코앞인 한 후배는 이번 학기부터 풀타임 교수로 대학에서 한국영화 과목을 가르친다. 한국에서 신문기자였던 그는 “죽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미국에 왔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이 무작정 식구들을 끌고 유학을 왔어요. 무모했지요”
40대 주부학생의 유학생활은 쉽지 않았다. 맞벌이 하다가 남편의 수입에만 의존하려니 경제적으로 늘 조마조마했고, 아이들에게 충분히 시간을 쏟지 못해 늘 미안했고, 15살씩 어린 학생들과 경쟁하려니 늘 뒤지는 것 같았고, 학업과 집안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죽도 밥도 안되는 게 아닐까 늘 불안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공부하는데 만족하자”며 8년을 매달린 끝에 그는 평생 하고 싶던 일을 하며 여생을 살게 되었다.
공학박사로 시카고에서 20여년 엔지니어로 일했던 이영옥씨는 지금 다시 교육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수업을 듣기 시작하다가 아예 박사과정으로 들어섰다. 엔지니어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가 50대 중반에 새삼 공부하는 이유를 그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엔지니어는 괜찮은 전문직이기는 하지만 의미가 느껴지는 일은 아니었어요.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어려운 여건 속에 공부하는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교수가 되어서 그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면 내 인생에 좀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환갑 넘어 카메라를 잡기 시작한 한 지인은 이제 사진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최근 국제적 사진 콘테스트에서 수상해 명실 공히 작가가 된 그는 평생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가정주부였다. 삼남매 키운 후 나날을 그저 골프 치며 즐기던 ‘팔자 좋은 여자’였는데 어느 날 문득 회의가 생기더라고 했다 - “남은 인생을 이렇게 끝내야 할까”
그래서 시작한 것이 사진 공부였다. 남편이 이미 사진에 심취해 있었고 좋은 선생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카메라와 가까워지면서 그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연기와 연출을 통해 경험했던 열정, 결혼하면서 접고 포기했던 예술적 감성이 렌즈를 통해 되살아나는 경험이었다.
“나도 뭔가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주는 재능, 2박3일씩의 출사 여행을 격주로 떠날 만한 경제적 시간적 여유, 물불을 안 가리고 빠져드는 집요함이 6년을 꾸준히 이어오면서 그는 이제 사진 없는 삶은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사진이 없었으면 공허해서 어떻게 살까” -그는 자주 생각한다고 했다.
모든 인생은 B에서 시작해 D로 끝나지만 그 사이의 C가 있어 삶이 제각각이라고 한다. ‘Birth - Choice - Death’이다. 현실에 안주하느냐, 뭔가를 새롭게 꿈꾸며 추진해 나가느냐 -‘이모작’도 결국은 선택의 문제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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