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학 전 어릴 적이다. 두메산골에 사는 이모들과 외숙모께서 우리집에 들리면 자주 나를 데리고 시골로 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쪼그만 계집애 보고 농담 삼아 같이 가자고 한 말을 곧이듣고 따라나선 것 같다. 네살 때 도시로 이사 나온 후 시골의 정취가 그리웠는지 낯가림 하지 않고 따라갔다. 호기심이 왕성해 이곳저곳 다니기를 좋아한 모양이다.
요즘처럼 찌는 더위에 무더운 바람이 휘익 불면 그 시절 이모 댁 가시투성이 탱자나무 울타리와 초가지붕에 얹혀있던 박 덩이와 하얀 꽃 달린 넝쿨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소가 있는 헛간 위로는 노란 꽃을 매단 호박넝쿨이 하루가 다르게 번져가며, 아침나절 저녁나절 다르게 호박 알이 쑥쑥 커가던 모습을 기억한다.
한여름 대낮에는 방문과 뒤편 들창문을 열어두었다. 뒷마당 대숲의 바람은 방안을 휘저어 앞문으로 빠지면서 집안을 식혀주었다. 혼자서 뒹굴뒹굴하면서 온갖 생각에 심심한 줄을 모르고 이모 내외가 들일 나간 집을 지키곤 했다.
큰 이모 댁은 딸 셋을 출가시키고 내외만 계셨다. 툇마루 밑에서는 쫑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모든 수컷 개를 쫑(John)이라 부르고 암컷은 매리(Mary)라고 이름 짓던 시절이다. 낮잠 자다 무료해지면 개울에서 동네 아이들과 팬티만 걸치고 땡볕을 쬐며 멱을 감았다. 어린 시절의 하루는 길었고 새롭고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다.
이모를 따라 나선 나름의 이유는 유난히 좋아하던 깻잎절임을 마음껏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텃밭에서 금방 딴 깻잎을 참기름 양념간장 묻혀서 금방 지은 더운밥과 함께 먹는 것을 좋아했다. 지붕 위 알이 굵은 박은 큰바가지 살림 장만하려고 남겨두고 작은 것만 이모부가 사다리를 걸쳐 두고 땄다. 오일장을 다녀온 날은 바지락 속살을 넣어 볶거나 때로는 멸치 넣고 참기름에 볶아 주셨다. 헛간 위의 호박도 새우젓 넣고 쪄 주셨는데 지금도 그 맛난 감촉이 입안에 뱅뱅 돈다.
갓 딴 깻잎, 호박, 호박잎, 푸성귀 등으로 지지고 무치고 찐 반찬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호박, 박, 푸성귀는 따고 또 따도 무슨 요술을 부리는 것처럼 금방 새로 쑥쑥 커졌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밀가루 면 포대에 미리 따 둔 호박과 깻잎 등을 가득 넣어 가져왔다. 자연이 주는 선물의 풍성함을 그때 알았다.
어느 날 이모 내외는 산 너머 사는, 갓 출가시킨 막내 딸네 집에 가신다고 나를 데리고 나섰다. 아마 사돈댁의 생신잔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모와 이모부는 딸네 집에 건네줄 신문지에 싼 고깃덩이, 소금에 절인 생선과 주로 농산물인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등짐을 지고 산길을 들어섰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산길을 이모와 이모부를 따라 걸었다. 두 팔만 흔들며 따라나선 산길은 걷고 또 걸어도 끝나지 않았다. 산길을 오르내리며 돌고 돌아 무한정 걸었다. 성황당 옆 아름드리나무 아래 돌무더기를 잔뜩 올려놓은 곳 옆에서 아침 길 떠나기 전에 싸온 도시락을 점심으로 먹었다.
재를 넘을 때마다 돌멩이를 하나씩 포개 올려 돌탑을 쌓은 것이 예닐곱 번 된 것 같았다. 뒤쳐져 걷다가 쉬다가 무수한 재촉을 받아 가면서 산길을 하루 종일 걸었다. 지금까지도 그때의 아픈 다리의 통증과 길고 긴 여정의 암담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여름 해지만 지리산 산정은 우악스레 높고 골은 깊어 어둠도 빨리 왔다. 하도 많이 걸어 정신이 혼미할 정도가 되었을 저녁 해거름 때, 먼 곳 골짜기 사이로 몇몇 초가지붕이 보였다. 뒤편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설설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도감이 밀려오며 다리에 기운이 절로 났다. 미리 기별을 받았는지 사돈 맞이 저녁밥상은 맛난 반찬이 많았다. 다시 이모 댁으로 돌아올 때는 짐이 가벼워져 이모부가 업고 와 편했는지 기억이 통 나지 않는다.
무더운 바람이 전해준 달콤 쌉싸롬한 추억으로의 여행 탓에 무더위도 견딜 만하다. 이렇게 떠오르는 기억들은 생을 반짝이게 하며 행복감에 잠기게 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는 나만의 세계이며 자산이다. 그 여행길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윤선옥 /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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