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걷히고 바깥의 풍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방안의 가구와 액자와 불 꺼진 램프의 윤곽이 드러난다. 얼른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잠이 싹 달아난다. 서둘러 막내를 깨워 학교로 보내야지 하다가 “아, 이젠 그 일이 영원히 끝났어”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잠자리에 다시 돌아눕는다.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 20여 년이 넘도록 기다려온 날이다. 십여 년 전 교육학 박사이며 세 아이의 어머니인 지인이 막내를 대학으로 보낸 후 “부모도 자녀로부터 해방될 권리가 있다. 얼마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운지 모른다”며 경험을 들려줬다.
세 아이의 엄마인 나는 생각했었다 - “나에게도 그 날이 오리라”. 어쩌다 한밤중에 깰라치면 소리 죽여가며 소제와 집안일을 하고 다시 자투리 잠을 자면서 “지금은 바쁘게 일할 때, 그 날에는 황금휴식이 오리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해가 떠 있는 날 집으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 왜 언제나 깊은 바다 속을 질주하는 것 같은 감청색의 어둠 속을 급하게 달려 집으로 가는가. 세 아이의 엄마가 늦은 시각에 집으로 향하는 것이 옳은가를 속으로 수천 번을 물었을 것이다. 출근길인 6가 길과 로스모어 길을 운전하는 가을날, 달리는 차창으로 무수한 낙엽이 떨어질 때면 안타까운 슬픔의 눈물이 흩뿌려진다고 느껴진 날이 대부분이었다.
이민 1세로서 낯선 환경 아래 보고배운 것 없이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려했으니 무모했고 아이들은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정서나 학업을 섬세히 살피는 것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른 이민가정처럼 시행착오를 겪으며 해냈다. 태어나 편안하게만 살다 가기를 바라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며 아이들도 적당히 고생을 하고 가족 간의 갈등도 겪으며 사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해괴한 논리로 자위했다.
첫째인 아들은 자랄 때 방 청소를 안 해주는 엄마 덕분에 청소하고 정리 정돈하는 도사가 되었고, 집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둘째 딸은 지난 학기 공부로 바쁠 때조차도 세탁기 소리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엄마가 집에 있다는 표시이기에 편안하고 마음이 놓여지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소리라고 한다.
막내아들은 맛없는 음식을 얼렁뚱땅 먹는 것에 지쳤는지 아주 꼬마 때부터 지금까지 TV 요리채널을 스포츠 채널보다 더 좋아한다. 운전을 시작한 후로는 직접 장을 봐 요리를 해서 먹는 일이 자주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찔리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배짱이 없진 않다. 인생길은 뭐든 척척 아귀가 맞아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생과 해결, 인간관계의 갈등이 일생을 채우는 삶의 알맹이임을 알기 때문이다. 신앙으로 무장하여 낯선 땅에서 여호수아처럼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먹고 눈꺼풀에 힘을 꽉 주고 가나안을 정복(?)하는 듯한 심정일 때도 종종 있었다.
막내가 고교를 졸업한 지 꼭 일주일이 지났다. 일종의 휴식이긴 하지만 ‘황금휴식’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감정이 착 가라앉아 기분이 좋지 않다. 말 수가 줄어들었다. 이 거북하고 불편한 감정은 무엇일까. “지나간 일에 대한 회한은 하지 말자”가 신조이니 ‘더 잘 양육하지 못함’의 후회 때문은 아니다. 나를 지탱해주는 행복의 원천 중 하나가 슬그머니 없어져버린 것을 이내 눈치 챘다. 일종의 존재감의 상실 때문이라고 스스로 진단한다.
각자가 개인플레이로 재미있게 인생을 살면 되는 거야, 행복은 자기 안에서 스스로 찾는 혼자만의 과제이며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자신의 에너지 한도 내에서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행복은 오로지 혼자 해결하는 문제였다. 지금은 할 일이 줄어들어 심신이 한가하니 행복감이 넘쳐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즐겁지가 않다. 뭔가 틀렸다. 즐겁고 기쁜 마음이 바로 행복 아닌가.
나에게 주어진 일, 어렵고 힘들었던 수고 그 자체가 존재의 만족감을 주었음을 실감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나의 존재가 의미 있다는 느낌, 그 자체가 행복이었음을 깊이 깨닫는 나날이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