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물을 포함한 각종 식재료를 한인 마트와 식당에 공급하는 한국식품의 윤노석 공동대표(59세)가 26일 헌츠포인트 피시 마켓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2시 30분. 금요일은 주말을 끼고 식당들로부터 주문이 많은 요일이기 때문에 평소보다 30분 정도 더 일찍 시장에 나왔다. 이날 구입해야 할 생선의 가지수가 50개가 넘기 때문에 윤 대표는 발걸음을 바삐 하며 시장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다.
“오늘은 가격이 어떨지 모르겠네...”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윤 대표가 처음 구입한 것은 광어였다. 최근 들어 마켓에 들어오는 양에 따라 매일 가격차가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이날 도매상이 요구한 가격은 파운드당 4달러 50센트. 우려대로 며칠 전보다 파운드 당 1달러 가까이나 더 올랐다. 잠시 입을 벌려 한숨을 쉬던 윤 대표는 흥정 끝에 ‘50전’을 더 깎아 400파운드를 구입했다.
“많이 사니까 그래도 좀 싸게 준거죠. 한, 두 박스 살 때는 그냥 달라는 대로 주는 수밖에 없어요.” 다행히 광어의 상태는 좋았다. 생선의 질이 안 좋은 날은 고객들의 불평을 들으며 반품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꼬깃꼬깃한 종이에 적힌 오더를 체크해가며 대구, 생태, 소라, 꽃게, 조개, 한치, 아구, 가자미 필레 등 필요한 생선을 구입하고 나니 어느덧 새벽 4시가 가까워진다. 윤 대표는 잠시 간이 카트에 들러 커피 한잔을 마시며 한숨을 돌린다.
윤 대표는 마켓내에서도 서너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고참이다. 23년이나 출입한 곳이다 보니 모르는 사람이 없어 지나다니는 상인들마다 인사를 하고 농을 건넨다. 언뜻 들으면 콩글리시 수준이지만 외국 상인들과 잡담을 하는 윤 대표의 영어는 거침이 없고 상대방을 웃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허기가 진 듯 닭다리 하나를 맛있게 먹고 있는 동료 한인과도 잠시 한담을 나눈다. “한국 사람들은 광어만 너무 찾어. 돼지고기 딴 거 안 먹고 꼭 삼결살만 먹는 것처럼 말야.” 충남 부여가 고향인 윤 대표는 82년 ‘단돈 200달러를 가지고’ 뉴욕에 왔다. 초반에 몇 군데 가게를 거친 뒤 한양마트에 취직해 생선 구입 업무를 맡았다. 13년간 한양에서 일한 뒤 트럭을 한 대 구입해 독립했고 몇몇 지인과 주식회사 형태로 한국식품을 설립했다. 이민 생활의 대부분을 초저녁에 잠들어 새벽에 일어나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만지며 보낸 윤 대표. 가진 것 없
이 이민 와서 자기 몸 하나를 고생시켜가며 가정을 꾸려온, 어찌 보면 익숙한 사연을 지닌 전형적인 이민 1세대다.
몸은 고달팠지만 “주급 생활 보다는 낫게” 돈을 벌었기 때문에 맞벌이 안하고 살기 힘든 뉴욕에서 와이프를 살림만 하게 했고, 두 명의 자녀를 잘 키워냈고, 뉴저지에 집도 장만했고, 오랜만에 한국을 찾을 때 고향친구들한테 술도 한잔 기분 좋게 사고, 그랬다. 마켓에서 주문한 물건을 모두 트럭에 싣고, 어스름히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하는 4시 30분경 퀸즈 매스패스에 위치한 회사로 출발한다. 아직 하루 일과의 반 밖에 마치지 못했다. 회사에 도착한 윤 대표는 장부를 살펴본 뒤 다섯 대의 밴 트럭에 물건을 나누어 싣고 뉴욕, 뉴저지 40여개의 식당으로 보낸다. 이 과정이 보통 3시간 이상 걸린다.
조그만 주방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만들어 직원들과 나눠 먹고 9시경 다시 트럭에 오른다.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거래처인 한양마트는 항상 이렇게 직접 배달해왔다. 언제까지 일을 할 계획이냐고 묻자 윤 대표는 “원래 3년만 더 할 생각이었는데, 요즘 계획한 대로 안 된 일이 있어 최소한 5~6년은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계획한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진 않았지만 오래 가고 있는 불경기와 아주 무관할 것 같진 않다. “작년부터 참 힘들었어요. 90년대 초 한창때랑 비교하면 매상이 40% 이상 떨어졌으니까. 주문도 줄었지만 수금하는 것도 많이 힘들어졌죠. 식당들도 어려우니까 제때 돈 주기 힘들지 않겠어요? 게다가 아예 문을 닫은 거래처도 생기는 데 돈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는 업계에 새로운 한인들이 들어오는 일은 갈수록 드물 것이라고 전망했다. 새로운 이민 세대나 젊은 사람들이 냄새나고 힘든 일을 꺼리고 인건비도 비싸서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 그러나 특별히 아쉬워하는 기색은 아니다. “이젠 타인종한테 넘겨줘야죠. 우리가 20~30년 전에 미국 사람들 힘들어서 안하는 일들 해가며 돈 벌었잖아요. 젊은 사람들은 이런 일 말고 좀 더 좋은 일 많이 해야 하지 않겠어요?”5년 후 은퇴해서 “나라와 주위 사람들한테 폐 안 끼치고” 편안한 은퇴 생활을 하는 것이 목표인 윤 대표는 그때까지는 지난 23년처럼 주 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객에게 신선한 생선을 공급하겠다고 말한다. <박원영 기자>
오전 12시30분에 마켓에 나와 싱싱한 생선을 고르고 있는 윤노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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