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 들른 적이 있는 옆 동네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집이 WBBM 뉴스에서 언급되었다. 머리를 말리다 말고 드라이어를 끄고 뉴스에 집중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뉴스의 내용은 이랬다.
그 아이스크림 집에서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 둘이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20달러 지폐를 카운터에 놓았는데, 종업원이 계산하기 전에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한테 전화를 했고 분개한 아이의 엄마는 경찰에 신고를 해 급기야 전파까지 타게 된 것이었다.
며칠 후 이 사건의 속편이 다시 전파를 탔다. 범인이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그 시각에 세 아이를 데리고 아이스크림을 사러왔던 한 여인이 계산을 끝내고 카운터에 놓인 그 20달러 지폐를 무심코 집어서 가게를 나갔다는 것이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사건의 주인공 두 아이에게 아이스크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했다, 라고 보도하며 아나운서는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해피엔딩을 알렸다.
아이스크림 살 돈이 증발해버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던 두 아이에게 이 사건은 평생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바로 이거다,’라고 작은 탄성이 나왔다. 문학서클 모임에서 강의 당번이 돌아와 자료를 찾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대에 살았던 50대, 60대 회원들에게 사연 있는 음식 하나쯤은 누구나 있을 것이었다. 유년기의 음식에 얽힌 이야기에 대해 써보자고 했다.
예상대로, 주제를 받자마자 회원들의 펜은 부드럽게, 쑥쑥 잘 움직였다. 30분 동안 고개를 숙이고 몰입의 경지에서 유년기를 거슬러 올라가 길어 올린 회원들의 음식이야기는 따뜻하기도 하고, 한이 서려있기도 하고, 교훈이 담겨있기도 했다.
어린 시절 아침마다 언니밥상에만 올려 져서 평생 동생에게 한으로 남은 달걀부침, 밥 대신 고구마로 끼니를 줘야했던 어머니의 운동회 날의 아픈 사연, 시댁에 첫 인사를 가 한 모금 마시고 반해 밤새 몰래 독에서 바가지로 퍼 마시던 막걸리, 자장면을 사주겠다던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한 야속한 가짜오빠, 여고시절 자습시간에 덧버선 발로 교문 밖을 빠져나가 사먹던 우동과 모리소바, 200원에 5개하는 사과를 6개 받아오고 좋아했다고 매를 드시던 어머니, 분식집을 배회하던 시절 친구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에 올라있던 튀김, 어려서 좋아하는 오뎅(어묵이라는 고상한 이름이 아니었음)을 실컷 못 먹어 지금도 장바구니에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 된 오뎅, 방과 후에 집에 오면 밭에서 갓 따온 애호박을 ‘다글다글’ 볶아 차려주시던 어머니의 밥상, 외숙모와 비밀로 드나들며 즐기던 곰보집 냉면…
짧은 시간에 요리된 이 맛난 글들을 다시 다듬고 다듬어, 내년에 엮기로 계획하고 있는 10주년 문집에 모두 싣기로 했다. 마무리로 드라마작가 노희경씨의 에세이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에 실린 유년기 음식에 대한 추억이야기 ‘불량한 피자두의 맛’을 공부했는데 작가가 “어린 시절에 늘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없는” 괴로움은 “청년기에 애인을 하루 이틀 못 보는 괴로움”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한 대목에서는 모두 “맞아! 맞아!” 했다.
음식이야기와 글로 맛난 문학서클 모임을 마치고 집에 오니 남편의 음식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저녁밥 이야기였다. 내가 문학서클 모임에 가는 날이면 남편은 바둑친구와 외식을 하고 돌아와 바둑을 두곤 하는데, 그날은 바둑친구가 우리 집에서 출장요리를 하겠다고 한 날이었던 것이다. ‘10분 만에 뚝딱’ 조리법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재료를 싸 들고 와서 그야말로 뚝딱,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맛나게 먹었다고 했다. 옆에서 당근을 까고, 양파를 벗기고, 스팸을 썰며 조수노릇을 한 과정을 신나게 설명하던 남편이 물었다. “나도 이걸 글로 써볼까? 10주년 문집에 실어 줄 테야?”
친구가 만들어준 ‘뚝딱 스팸 카레라이스’가 남편의 가슴에 오래오래 깊이 남아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영옥
엔지니어·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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