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렬 (교육가)
구두닦기, 차 씻기...가 손쉬운 직종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이 택한 선물이란다. ‘스승의 날’ 그들이 할 일을 선물로 정하여서 스승의 구두를 닦고, 차를 씻는 사진이 보도되었다.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소위 촌지의 폐습을 막으려고 휴교까지 생각하는 사회에, 푸른 공기를 불어넣는 모습으로 보였다. 이런 일조차 교사들에게는 마음의 부담이 되었겠지만 그들은 훈훈한 정을 느꼈을 줄 안다.
친구들을 귀찮게 하던 어린이가 무엇인가 골똘히 만들고 있다. 한참 장난을 하더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은 모양이다.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어린이가 한 가지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하였다. 집중시간이 짧겠지만 신통하다. 글짓기를 한다고 여러 장의 종이를 찢거나 구겨서 버리더니 그가 종이 한 장을 붙들고 있다.어른도 대동소이하다. 처음부터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 일은 드물다.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드디어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것도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결코 짧지 않아 보인다. 다년간 물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던 화가가 어느 날부터 간결한 선이나 도형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어느 작가는 풍부한 형용사와 부사가 가득 찬 현란한 글을 쓰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말을 아끼고 절제하기 시작하였다.
무엇이나, 어떤 일에나 그 과정이 있다. 어린이에게는 성장하는 과정이 있고, 어른에게는 성숙하는 과정이 있다. 어떤 과정이거나 미숙함이 있음은 당연하다. 갈팡질팡하며, 왔다갔다하며, 맑았다 흐렸다하며, 강했다 약했다하며, 굵다 가늘다하며 온 세상을 헤매는 모습으로 보이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관점을 달리하면 아름다울 수 있다. 성장하면서 또는 성숙하면서 뿜어내는 에너지를 느낀다면 그것은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성장통이라고 부르면 좋을 것이다. 말하자면 어수선한 성장통을 겪지 않고는 세련된 도달점을 찾지 못하는 것 같다. 생리적으로 홍역을 치르듯, 성장통은 생존을 위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이 삶을 이어가는 길목이라면 마음 편히 지나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어려운 과정이 없이 깔끔한 일터에 도달하기 힘들다. 복잡한 과정이 없이 간결한 초점을 찾기 힘들다. 지저분한 물건들을 자세히 보다가 반짝이는 구슬을 찾는다. 허드렛일을 하다 보면 좀 더 나은 일을 찾는 지혜가 싹 튼다.결과보다 그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은 교육에 한한 것이 아니다. 바라는 결과는 단숨에 얻을 수 없다. 긴 여정 과정을 거치며, 일에 대한 신념과 자신이 길러지고 필요한 기술이 연마된다. 이 과정을 단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본인의 연구심과 노력의 축적이 해결한다. 어쩌면 반대로 이
시기를 실컷 즐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들의 경우도 성장 과정을 단축하려고 하기보다는, 성장 과정을 너그럽게 지켜보고 이해하며 다양한 체험의 기회를 마련하는 일이 그들을 돕게 된다.
그런데 성장통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나라의 정책, 지역사회의 행사, 시민을 위한 시설과 지켜야 하는 규정, 모임의 회칙과 일의 차례, 좌담 형식과 내용, 박람회의 목적과 행사의 절차, 광고. 간판. 인쇄물 디자인과 그 내용...등 일상 생활에서 성장통을 앓고 있는 상태와 그 과정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성장한 부분이 눈에 띄면 큰 기쁨이 된다. 그래서 모든 일, 모든 사람이 성장통을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이면 격려하고, 일의 본질을 파악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이면 힘껏 박수를 보낸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 생각이 새로워지고 있으며, 하는 일이 간결하지만 중심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한다. 이런 모든 현상은 성장통을 통과하였다는 신호이다. 이렇게 보면 성장통은 하나의 자극적인 에너지이고, 하려는 일의 튼튼한 기반을 이룬다.
한국에 따로 ‘스승의 날’이 있음은 나라의 마음 한 가닥을 알리는 자랑스러운 날이다. 나 자신을 키워주신 스승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날을 중심으로 오고가는 말이 많더니, 구두닦기와 차 씻기, 편지 쓰기...등으로 마음의 선물을 찾은 학생들이 이미 성장통을 벗어났음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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