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귀한 손님이 오신다. 집안 청소를 잘 해라”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당신도 세수를 깨끗이 하고 머리를 단정히 빗고 옷을 갈아입으셨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중이던 그날은 과외공부반의 소풍날이었다. 안양 포도밭으로 소풍가서 잘 놀고 돌아오니 집안이 수런수런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오래 몸져 누워계시던 할머니는 그렇게 스르르 세상을 떠나셨다. 양초가 다 타서 불꽃이 스러지듯 육신에서 마지막 남은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자 죽음이 들어섰다. 죽음은 마땅히 그렇게 자연스러워야 하고, 옛 어른들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감지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자연의 일부로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자연현상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자연성을 거스르는 의료행위가 현실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오복(五福)의 하나인 고종명(考終命)이 정반대의 의미로 어려워졌다. 천수를 누리고 편안히 죽는 것이 고종명인데 현대의학이 끼어들면서 천수가 다한 후에도 죽지를 못하는 것이다. 의식도 감각도 없이 기계장치에 의존해 다만 한 덩어리의 몸으로 누워있는 환자, 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란에 빠진 가족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해 지난 21일 한국 대법원은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단계로 들어섰고, 연명치료를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면 생명연장 장치를 거부·제거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국 내 판결이지만 미주한인들 중 노부모가 한국에 계신 경우가 많은 만큼 직접적 영향을 받게 된다.
‘나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시점에 왔다. ‘존엄사’나 ‘안락사’가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문제로 바짝 다가왔다. 아무 의사 표시가 없으면 자연사하게 내버려 둬야 맞을 것 같은 데 현실은 그 반대다. 입에는 산소호흡기, 코에는 음식주입 튜브 등 온갖 장치를 주렁주렁 매달고, 죽지 못하도록 끝까지 막는 것이 오늘의 의료 시스템이다.
남가주에서 시작된 소망 소사이어티는 ‘아름다운 마무리’ 캠페인을 벌이는 단체다. 이 지역 대표적 올드타이머인 유분자 이사장은 “삶 못지않게 죽음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2년 전 단체를 설립했다고 한다.
“간호사로 오래 일하면서 죽음을 늘 가까이서 느꼈어요.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 같더군요. 언제 어느 때 뒤집어질지 몰라요.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다가 비참하게 말년을 보내는 노인들을 너무 많이 보았어요”
그의 친지 가족이 그런 케이스였다. 친지의 노모가 무릎 수술을 받던 중 뇌사상태에 빠졌다. ‘간단한 수술’이라는 의사의 말에 수술 후 가족여행을 가려고 비행기 표까지 사두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수술 중 돌연 의식불명이 되더니 6년간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튜브로 영양을 공급하는 연명장치만 안했으면 깨끗하고 품위 있게 자연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의사표시가 없어서 천형 같은 6년을 보낸 것이었다. 그 세월 동안 자녀들이 받은 고통 또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한인사회에 이런 케이스들이 많다”고 그는 말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소망소사이어티는 우선 소망유언서 작성을 권한다. 갑작스런 사고로 의식을 잃거나 사망할 경우에 대비해 본인의 소망을 분명하게 기록해 두라는 것이다. 유언서는 사망단계에 연명장치를 쓸지 여부, 법적 대리인을 누구로 할 지, 장례는 어떤 형식으로 할 지 등의 항목을 담고 있다.
아울러 소망소사이어티가 전개하는 것은 장례의식 간소화 운동이다. 입관·장례·하관 등 3번의 예배 대신 한번의 예배, 매장보다는 화장, 그리고 장기기증을 장려한다. 홀가분하게 삶을 마무리하자는 취지다.
가끔은 죽음의 자리에 서서 삶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나는 어떤 모습으로 돌아갈 것인가, 나의 장례식장에는 누가 올까, 떠나는 나를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 생각해보면 삶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잘 준비된 죽음은 남은 삶도 아름답게 한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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