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주, 주부, 엄마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한가할 틈이 없다. 아마도 빨래를 개는 시간이 가장 한가할 것이다. 볕이 잘 드는 환한 창가에 앉아서 빨래를 개는 시간을 좋아한다. 빨래를 개는 단순한 일을 할 때는 머릿속조차 한가해진다.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이 취미이다 보니 일하면서 취미(?)도 살리는 그 시간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산행도 비슷하다. 건강을 위해 걸으면서 온갖 생각을 할 수 있으니 나의 적성에 딱 맞는 여가활동이다
4월과 5월 두 달 동안 매주 토요일 시간을 낼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모처럼 찾아온, 쉴 수 있는 주말에 여러 가지 일들을 놓고 우선순위를 신중하게 가려 보았다. 평소 하고 싶었던 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토요일 새벽예배를 마친 후 만사를 뒤로하고 산행 팀에 합류했다. 산행 팀의 리더는 일흔을 넘긴 연세지만 리더답게 제일 산을 잘 타고 캘리포니아 하이킹코스를 꿰뚫고 있다. 다양한 코스를 안전하게 쉬이 지치지 않도록 자상하게 인
솔한다.
아침 일찍 떠나는 산행은 부지런해야 한다. 그러니 노력 없이 쉽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아니다. ‘귀차니즘’을 떨치고 부지런을 떤 만큼 산행은 여운이 긴 즐거움과 건강을 준다. 방황하는 지구인이 되어서 이 산 저 산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것이 마음에 든다.
4월의 첫 토요일은 2번 도로를 타고 산으로 45분쯤 운전하고 간 워터맨 산, 둘째 주는 2번 도로 9마일 지점에서 시작하는 베어 캐년, 지난주는 발디 산 초입에 있는, 한시간반가량 끊임없이 올라가면 고사리 밭이 나오는 코스로 하이킹을 갔다. 산의 고도에 따라 또는 지역에 따라 상수리나무 숲, 소나무 숲, 측백나무과인 레드우드 숲 속에서 배낭을 멘 등짝이 푹 젖도록 땀 흘리며 걸었다.
건조한 지역에는 자잘한 자갈길, 개울물이 넘친 곳은 진흙탕 길, 짙은 숲 그늘에는 축축하게 젖은 잎이 폭신한 길을 걷거나 징검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시원한 개울물 소리와 함께 걷는, 아기자기하고 경치 좋은 하이킹 코스가 LA 시내에서 30분 내지 한 시간 거리 안에 널려 있다. 첫 주에 간 워터맨 산은 4월인데도 눈이 녹지 않아 눈길을 밟는 발이 20센티 이상 쑥쑥 들어가는 비탈길을 지그재그로 스릴 넘치게 걸어 정상으로 갔다. 산으로 오르는 중에 끊임없이 온갖 생각들이 나에게 찾아오니 더욱 좋다.
나이 드는 즐거움 중 제일 마음에 드는 것 하나는 끝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반갑고 편안한 마음으로 맞을 수 있는 점이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아름답게 보이고 젊은 시절의 고통스런 후회와 실수의 기억조차도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용납을 할 수 있는 점이다.
나이 드는 즐거움 중 또 다른 하나는 굽이굽이 자연 속에 담겨진 다양한 아름다움을 드디어 깨치고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이름 모를 야생화 모두 나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보일락 말락 눈곱만큼 작은 꽃을 비롯한 모든 들꽃이 똑같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예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연의 일부인 사람도 모두 아름다운 존재임을 알아챈다. 좁은 소견과 천박함으로 사람의 등급을 매기고 구분을 지어 경솔하게 대하지만 어찌 우리가 그런 존재인가. 들풀들도 모두 나름의 멋과 아름다움이 있듯 사람도 각자 나름의 개성과 장점을 가진 멋진 존재이다. 아끼고 귀하게 대해야 함을 산행을 통해 배운다. 천년 이상의 수명으로 유장하게 곧게 서 있는 레드우드에 비교한다면 정든 곳과의 이별이 멀지 않은 인간의 숙명에 한없는 연민을 느낀다.
삶은 신이 준 특권임을 가파른 산길을 느릿느릿 걷는 중에 깨닫는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에는 온갖 욕망과 근심을 내려놓고 생명 그 자체의 환희에 휩싸인다. 저 아래에서 욕심으로 비롯된 불안에 사로잡힐 때의 삶은 얼마나 쓸모없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에 대한 경이는 생명 있음에 대한 기쁨으로 이어진다. 산을 내려올 때 가슴은 자존감으로 충만하여 발걸음이 더없이 가볍다. 자연은 신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위로임을 4월의 산행으로 실감한다. 산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얼마나 멋진 일인지 오를 때마다 산은 적절한 답을 준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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