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로이트의 시부모님이 작은 아들 부부가 사는 위스콘신주로 이사 가기로 작정하신 것은 2년 전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실업률이 높고 불황의 타격도 제일 큰 미시간주여서 집값을 형편없이 내려서 시장에 내놓았지만 집 매매가 거의 없는 도시이다 보니 2년여 동안 집을 보러온 사람도 몇 사람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주 집을 파시게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최고 시세에서 거의 반값으로 파는 것인데도 무척 좋아하셨다. 우리도 부모님이 모든 것이 침체되어 있는 그 도시를 드디어 빠져나오시는 게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며칠 전 공영 라디오방송(NPR)이, 예산삭감 혹은 학생수 부족으로 폐쇄된 디트로이트 저소득층 학교들을 다니며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사람을 인터뷰했다. 폐허가 된 학교 교무실엔 서둘러 학교 문을 닫은 바람에 재고 학용품들이 수도 없이 쌓여 있는 것은 물론 학생들의 신상기록들이 여기저기 쓰레기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고 했다.
그 많은 기록들 대부분은 학생들의 폭행, 강간 등의 피해 기록이었는데 눈물 없이 읽을 수가 없었다며 그것들을 차마 그 곳에 그냥 두고 나올 수가 없어서 집에 가져와 없애버렸다고 했다. 미시간주를 나오실 수 있게 된 시부모님 생각이 나면서 구매자가 다시 한 번 고마웠다.
그날 저녁 우리 동네의 한 커다란 극장에선 ‘코스비 쇼’ 등 TV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 빅토리아 로웰의 강연이 있었다. 친어머니의 정신장애로 18년간 대리양육 가정에서 자랐던 그녀는 스스로 대리양육 아동들을 위한 발레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현재 연기는 완전히 뒤로 하고 2007년도에 출판되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나를 길러준 여성들’이란 책 홍보여행을 하면서 대리양육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
그녀가 출연했던 ‘Young and the Restless’는 디트로이트 유학시절 5년 동안 거의 매일 보았던 일일 드라마여서 내겐 이름만 들어도 특별한 느낌이 생기는 드라마다. 아침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테이블에서 혼자 점심을 먹으며 보다가 드라마가 후반부에 들어갈 때쯤 소파로 옮겨서 봤다. 항상 잠이 모자라서 끝나기 전 10분쯤 꼭 낮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나면 오후 수업을 들을 에너지가 생겼다.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드라마틱하게 끌고 가는 드라마였지만, 밥 먹거나 쉬는 시간을 이용해 영어회화 공부를 한다는 계산으로 시작된 그 시간은 유학생활 중 가장 편안했던 나만의 시간이 되었다.
그녀의 강연은 대리양육 가정의 엄마가 아주 어릴 때 자신의 소질을 계발해 준 덕에 발레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얘기로 시작되었다. 순전히 양육 엄마의 열성과 발레 학교 선생의 끝없는 도움으로 뉴욕발레 단원이 될 수 있었던 자신은 행운아라고 했다.
15세 때 어떤 선생님이 단 한번 자신을 멋진 식당에 데려가 ‘티’를 마시게 해 준 일도 평생 강하고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며, 대리양육이 힘들면 단 한 번이라도 단 한 양육아동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주기를 권했다. 그제야 시부모님의 디트로이트 탈출만 생각했지 폐쇄된 학교의 학생들, 남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조금도 헤아려 보지 않은 게 미안했다.
대리 양육가정의 아동들은 어려움 끝에 대학에 가도 사람 대하는 일이 자연스럽지 못하기도 하지만 용돈이 없어서 모임에 끼지 못해 학교를 떠나는 일이 많다고도 했다.
자신이 줄리아드에 다닐 때도 장학금이 나오고 사회단체들이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었지만 실질적 민생고인 밥 먹을 돈 혹은 친구와 커피 한 잔 마실 돈이 있는가를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며 대학생 고아들에게 용돈을 기부할 것도 권했다.
극장의 500~600명 청중은 전부 여성들이었다. 대개 전문직 여성들로 직장에서 곧바로 온 복장이었다. 이 중소도시에서 그렇게 많은 전문직 여성들이 빅토리아 로웰의 대리양육에 관한 말을 들으러 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긴 그들 중엔 비영리단체에서 봉사활동하는 이들의 얼굴도 많이 눈에 띄었다. 풀타임으로 봉사활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연이 끝나자 모두 일어나 그녀에게 열광적 박수를 보냈다. 아, 이들이 미국의 힘이로구나!
김보경
대학 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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