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말이지만, 사람의 실제 삶이 소설보다 더 극적일 때가 많다. 존 뎀자뉴크(John Demjanjuk)라는 노인 이야기가 그 본보기이다. 추방 하루 전인 지난 4월3일 일시 유예를 받고, 이민판사의 최종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올해 89세 된 이 노인의 추방재판은 무려 3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구 소련령 우크라이나 태생의 이 노인은 1940년 소련군에 징집돼 유럽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곧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의 포로로 된 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연방 법무부와 본인의 설명이 엇갈린다. 법무부는 그가 독일군 밑에서 유대인 집단수용소 간수 노릇을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본인은 처음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군 포로로 잡혀 포로수용소에 있었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말을 바꾸어 포로가 된 다음 독일 전투부대에 배속되었다고 강변한다. 전후 뎀자뉴크는 국적 미상자 케이스로 1952년 미국으로 이민하게 되고,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살며 포드사 미캐닉으로 일하다 은퇴했다. 58년에는 미시민권도 얻었다.
그러다 나치 전범 수용소에서 간수로 일했다는 전력이 불거지면서 81년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이스라엘로 추방되어 재판을 받는다. 폴란드 소재 나치수용소 생존자들이 그를 악명 높았던 간수 ‘공포의 이반’이라고 지목하는 바람에 이스라엘에서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공포의 이반’이 다른 사람이라는 일부 증거가 구소련의 고문서 더미에서 나오자 이스라엘 대법원은 “피고인의 마음까지 읽을 수 없는 세상의 법정은 겉으로 드러난 증거로만 판단할 수 있을 뿐이고, 완벽한 진실은 세상 법정에서 도달할 없다”라는 코멘트와 함께 검찰이 제시한 증거만으로는 이 사람이 ‘공포의 이반’이라기 보기에 불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교수형의 문턱까지 갔던 그는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시민권도 되찾았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 연방 법무부는 이 사람이 ‘공포의 이반’은 아니지만 나치 수용소에서 간수로 일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래서 시민권도 박탈되고 결국 추방명령을 받은 것이다. 독일 정부도 그가 송환되면 전범으로 형사 처벌한다는 방침이다.
뎀자뉴크는 실제로 나치수용소에서 간수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아흔을 바라보는 이 노인은 지난 30년 넘게 시달릴 만큼 시달렸고, 혼자서는 보행도 하기 힘든 환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적으로는 짠하다. 더구나 그가 겪은 많은 일은 본인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 상황이었다.
소련군에 징집되어, 대독전쟁에 동원된 것도 본인의 뜻이 아니었다. 독일군의 전쟁포로가 되어 유대인 집단수용소의 간수노릇을 한 것도 히틀러나 나치를 지지한다는 생각 없이 목숨을 건지고, 덤으로 전시에 좀 편하게 지내려면 포로로 남아 있는 것보다 그 편이 낫을 것 같다는,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같은 상황에 있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별 고민 없이 할 선택이었다고 하겠다.
이 사람은 2차 세계대전 후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있다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서 붙잡혀 이스라엘로 끌려와 재판을 받고 사행 집행된 아돌프 아이히만 같은 나치전범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 본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원흉 아이히만이 너무나 평범하고 자상한 가장이며, 자기 임무에 충실하려고 애썼던 사람이라는데 놀랐고, 그래서 행위의 결과가 가져올 악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비판 없이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의 행위를 ‘악의 평범함‘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보잘 것 없는 나치 수용소의 전직간수 노인은 지난 30년 동안 전범 색출과 추방 업무를 전담하는 연방 법무부 특별수사국의 집요한 추적의 대상이었고, 이 기관의 오류 때문에 이스라엘로 추방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그의 집 앞에는 시위대가 진을 치는 수난을 겪었다.
이 노인의 고단한 삶에서 악의 평범함을 읽기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제도 앞에서 아무런 의미 있는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상황에 따라 흘러가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에 나오는 무력한 인간의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김성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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