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의 진열대에서 카트에 집어넣기에도 부담이 되는 콩나물 한 자루를 샀다. 어른 베개 갑절 부피이다. 콩나물국으로 나물로 고추장찌개로 볶음밥으로 된장국으로 김칫국으로 국수잡채로 한줄기도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2주 동안 먹었다. 점심도시락으로 김치 콩나물 볶음밥을 쌌고 나물무침 한 보시기가 냉장고에 남았다. 콩나물을 사서 실컷 먹을 때 마다 물리기는커녕 마음속 깊은 만족과 안도감을 느낀다. 종종 큰 콩나물 자루를 카트에 집어넣는다. 콩나물을 많이 먹었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처녀 가장인 때가 있었다. 고향의 편모가 파산을 해 대학 다니는 여동생과 여고생인 막내를 맡아서 부양했다. 마르지 않는 금고처럼 말만하면 돈이 송금오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양장점에서 옷을 맞추고 수제화 구두를 맞춰 신었고 세 딸이 서울로 유학 올 정도로 넉넉한 형편에서 단칸 월세 방으로 밀려나버린 시기였다. 대졸 여직원의 초봉이 빠듯했던 시절 학비부담은 물론 집 월세를 치르고 세 식구가 먹고살아야 했다.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적은 돈을 어떻게 쪼개야 할까 궁리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월급을 받으면 먼저 방 월세를 내고 한달 치 쌀을 산다. 세 자매의 통학과 통근을 위한 버스토큰을 사고 겨울에는 한달치 연탄 60장을 산다. 학교의 준비물 비용 등 이리저리 쪼개고 나면 찬거리의 비용으로는 콩나물과 감자 몇 알 살 돈 밖에 남지 않았다. 콩나물과 감자는 싼 데다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연탄은 꺼트리면 번개탄을 사서 불 붙여야하니 정신을 바짝 차려서 연탄을 제 시간에 구멍을 잘 맞추어 갈아야 했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이라도 밤새 연탄이 다 타버리면 안되니 바람구멍을 잘 틀어막고 자야했다. 바람구멍을 꼭꼭 눌러 막고 자도 배고픈 쥐가 물어뜯어 바람구멍이 열리면 연탄은 하얗게 다 타버렸다.
눈이 펑펑 쏟아 부은 다음날은 쨍하고 깨어질듯 추웠다. 연탄집개로 타버린 연탄을 집어 미끄럼 방지로 길가에 깨어 부수는 나의 팔엔 원망의 힘이 실려 있음을 느꼈다.
눈을 들어 환하고 푸른 하늘 아래 자유롭게 날고 있는 비둘기를 바라보았다. 내 마음엔 이내 흐렸던 그림자가 서서히 밝아지고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간밤에 읽은 책 탓이다. 시베리아의 수용소에 억울하게 정치범으로 갇힌 이반 데니소비치. 창 마다 손가락 두개 두께만한 얼음이 붙어있는 숙소에서 먹을 거라곤 시커멓고 멀건 양 배춧국뿐인 그의 절망적일 것 같은 노동의 나날 속에도 그에겐 살뜰한 만족과 기쁨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날고 있는 저 비둘기처럼 자유롭다. 가난을 즐길 정신적 여력과 용기가 있다고 되뇌었다. 절약하며 사는 살림살이의 기술도 필요하지만 평생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가난한 형편을 감당하고 살아가려면 정신적인 무장도 중요했다.
하루하루를 생각 없이 소비만 하며 살던 생활에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하는 의문이 끝없이 밀려왔고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애썼다. 암담하게 느껴질 때는, 교회를 가본 적이 없는 데도, 성경을 자주 읽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말씀은 몇년전 돌아가신 증조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옛이야기 속의 깨우침인 ‘착하고 올바르게 살면 하늘이 복을 내린다’는 내용과 비슷해서인지 마음에 와 닿았고 그 말씀이 어려운 시절 내내 위로가 되었다.
낭비하며 살았던 철없던 시절에 대한 반성이 계속되었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산 것에 대한 반성, 멋진 옷들이 많은데 사람들은 왜 제대로 옷을 못 입는지 어리석다고 함부로 단정했던 데 대한 반성, 평생 안정된 직장을 보장하는 고향의 사범대학을 가지 않고 실속 없이 비싼 비용을 들여 서울의 사립대학으로 진학한 허황된 가치관에 대한 반성, 반성들.
그런 반성이 있었기에 이젠 찬값으로 콩나물 한 자루와 감자 한 자루 살 돈이 있다면 내 삶의 바닥은 아니다. 나머지의 모든 것은 사치일 뿐이고 밝고 환한 대낮에 얼굴을 찡그리고 다닐 아무런 이유가 되지 않는다.
헨리 제임스는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파산하거나/ 불명예에 빠지거나/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교수형을 당한다 해도,/ 그것으로 당신의 삶이 실패했다고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실패한 삶이지요>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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