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가르쳐 준 첫 영어문장
‘홧 이지 지스? ‘ 일본식 발음 인상적
긴 겨울밤 영어책 붙잡고 씨름도
정원훈(88) 전 행장은 타고난 금융인이다. 60년을 금융계에만 몸담아서가 아니다. 고객 앞에선 가족처럼 포근하고 돈 앞에선 얼음처럼 냉정하다. 그래서 한국과 LA를 오가는 한평생 금융생활에서도 잡음 한번 일으킨 일이 없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다. ‘나는 배고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그의 인생철학인 이유다. 중국어와 영어 구사도 모자라 70대에 독일어를 배운다고 조깅할 때마다 독일어 테입이 든 헤드셋을 머리에 끼고 뛴다. 80세에 현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화가로, 또 서예가로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이고 있다. 수차례 개인전과 단체전도 가졌다. 가주외환은행을 비롯, 한미은행, 새한은행, 아시아나은행 등 무려 4개의 한인 커뮤니티 은행을 설립했다. 그래서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은행 감독국에서도 그는 ‘한인 은행계의 대부’로 통한다. 그의 인생 스토리는 미주 한인은행사의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정 전 행장의 자서전 ‘은행 60년: 거울 앞에 돌아와’를 주 1회 연재한다.
Palo Alto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돈집의 딸아이가 다니러 왔다기에 친척들을 불러 모아 점심식사를 했다. 다 모이고 보니 20명이 된다. 어린 아이가 둘,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합쳐서 열, 어른은 여덟 명이다. 이들이 이곳에 사는 우리 사돈의 8촌까지 합친 친인척 전부다.
식사를 하면서 나는 시중드는 점원들에게 중국말을 가끔 건네게 된다. 그 사람들하고는 그들의 말이 쉽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이 날더러 어떻게 그렇데 중국말을 잘하느냐 묻기에 이렇게 답했다. “잘하는 것 같이 들리는 거지 사실은 잘하는 것은 아니야.” 늘상 사용하는 말만 들어본다면 나의 중국어 실력은 제법이다. 북경말 이지만 타지방에서 온 중국인들보다는 제법 잘해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늘 쓰는 말이 아니어서 어휘가 너무 적어 길게는 못한다. TV에서 하는 중국어는 모니터에 자막을 보여주는데도 알아듣기 힘들다. 나의 중국어 실력은 유치반 말이라 할 정도의 초급수준이다. 중국이 영어권 국가들처럼 세계 정치, 경제를 주도했더라면 나도 중국말에 능한 비중국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주도하는 세상이 되다보니 어느새 영어가 나의 제1외국어가 되었고 한국에 살면서도 직업상 영어를 많이 사용한 것 또한 부득이 또 자연스레 영어와 가까워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우리말과 유사성이란 거의 없는 꼬부랑 글인 영어와 별반 저항 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나의 동갑내기 중에서는 오히려 드문 예가 아닌가 싶다.
내가 맨 처음 영어를 만난 것은 1930년 10살 때였다. 평북 구성이란 곳으로 아버지가 철산에서 전근을 가신 곳이기도 하다. 처음 우리는 셋집에 살게 되었는데 그 집 뒤에 천도교교회당이 있었다.
어느 해 여름방학 때 신의주고보에 다닌다는 학생이 와서 천도교교회 소년단에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말이 돌았다. 나의 이름이 소년단 명부에 올라와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ABCD를 배웠을 것이다. 그러다 첫 문장을 접하게 되었다. “What is this?” 깡마른 스포츠맨형의 중학생은 이것을 “홧 이지 지스”로 발음한다. ‘홧’에 힘이 들어가는 그의 발음이 인상적이었다. 다음날은 영어시간이 없었지만 친구에게 물었더니 “홧 이지 지스”란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보지만 야릇하고 생소하기만 하고 말이 아닌 것 같기만 했다.
정식으로 영어를 배우게 된 것은 중학에 입학해서였다. 내가 다닌 학교는 일제시대의 상업학교였는데 한 학년이 50명으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반반이었다. 조일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던 5년간의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은 우리가 일본인들보다 체력 면에서도 뛰어나다는 점이다. 동시에 우리들은 그들부터 배울 점-단체정신 등-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영어담당선생은 일본의 동경상대를 나온 연만한 양반이었다. 신입생인 우리들에게 우선 발음기호를 떼게 했다. 또 영어선생이 발음기호를 되풀이 하는 데는 나는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았다. 그 선생님 덕분에 나는 훌륭한 영어발음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어쩌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그런 영어기초는 평생을 두고 나에게 도움이 되어 준 것 같다. 이런 언어 학습 방향은 나의 중국어에서도 자그마하지만 버팀목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2년간 배웠던 과목이고 결국 꽃을 피우지 못한 나의 중국어이지만 아직도 가끔 사전을 펴보며 못 다한 한을 달래곤 한다.
중학시절의 영어독본은 ‘King’s Readers’였던가 싶다. 이국적인 느낌의 그 영어 독본이 오랫동안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영어 알파벳에서 가장 특이해보였던 것은 w와 x였다. 단음바탕의 우리말의 언어감각에서는 아주 낯설어 보였다. 더하여 F발음, 이 또한 신기했다.
우리학교에서는 3학년 중반부터 대충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진학반과 취직준비를 위한 취업반으로 나뉘어 공부를 했었다.
진학반은 영어 등의 학문적인 과목을 더 많이 택하고 취업반은 중국어와 실무과목에 주점을 두었다.
내가 지망하는 고등상업학교에 들어가려면 상업수학, 부기 그리고 영어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었다. 이중 영어가 배점도 많아 이 과목에서의 득점이 합격의 성패를 가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반도의 서북단인 신의주의 겨울은 길고 가혹하다. 4학년과 5학년 두 겨울, 기나긴 밤을 늦게까지 영어참고서들과 씨름을 했다. 너무 추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상에 앉아 당시 일본에서 가장 좋다는 입시 참고서와 3~4종을 되풀이해서 읽고 베끼고 했다. 고행을 끝내고 졸업년도 1938년 2월 서울로 입시를 보러 올라갔을 때는 또 각별한 감회를 가졌다.
정원훈 전 행장이 자서전‘은행 60년: 거울 앞에 돌아와’를 발간하게 된 배경과 주요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원훈 전 행장 약력
*20년 평북 철산 출생
*38년 경성고등상업학교
(서울대 상대 전신)졸업
*58년 클라크대 경제학 석사
*41~45년 만주국 중앙은행 근무
*47~50년 제일은행 론오피서
*50~67년 한국은행 조사·국제부장
*66~72년 한국외환은행 창립멤버,
전무 역임
*73~79년 가주외환은행 설립,
초대행장
*79~80년 가주외환은행 고문
*80~87년 한미은행 설립, 초대행장
*87~88년 한미은행 고문
*88~96년 새한은행 설립, 초대행장
*97~2001년 아시아나은행 설립,
초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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