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또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움직이는 스텝위에 발을 올려 놓기 전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벌써 이십여년은 족히 지났는데도 에스칼레이터만 대하면 어머니 생각이 나는 탓일게다. 아마도 더위가 물러가기 시작하는 늦여름이었거나,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상쾌 하게 느껴지는 초가을이 아니었나 싶다.
어머니는 하늘하늘한 긴소매 로얄 불루드레스를 입고 계셨다. 계절이 바뀌어서 나는 어머니에게 옷이라도 한벌 사드리 려고 벼르다가 시간을 내어 함께 쇼핑을 나갔었던 것 같다.
어머니와 나는 몰 안에 있는 샌드위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자주 가곤 하던 상점으로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앞서 가던 어머니가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 스텝위에 한 발을 올려 놓은 채, 다른 쪽 발을 올려 놓지 못하고 허둥대더니 그대로 기우뚱 쓰러지며 주저앉는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서 “아니, 엄마”하면서, 어머니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껴안았다. 키가 크시 고 체격이 육중하신 어머니는 당황하고 놀란 안색으로, 내 팔에 온 체중을 실으시며, 움직이는 에스컬레터에서 일어나시려고 버둥거리셨다. 다행히 윗쪽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젊은이가 팔을 잡아 가까스로 어머니 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 날의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에스컬레이터 일로 신경을 많이 쓰셨던 탓인지, 어머니는 경황이 없으신 얼굴로 평소와 달리 허둥거리셨다. 그때 아마 우리는 쇼핑도 제대로 못했던 것 같다.
갑자기 내 팔 을 잡고 걸으신던 어머니가 화장실에 가셔야 한다기에, 화장실이 있는 이층의 코너를 찾아 코스를 바꿨다. 그런데 그날 따라 린넨 코너에 있던 화장실이 눈에 띄지를 않았다. 분명히 이층 코너 한쪽 벽에 린넨과 타올등이 진열되어 있고, 선반위로 필로들이 많이쌓여 있던 곳이 분명한데 화장실은 온데 간데 없는거였다.
당황해서 잠시 서서 사방을 돌아보는데, 뒤에 따라오시던 어머니가 말도 못하시고 얼굴이 새하얗게 굳어져서 허리를 움켜쥐고 계신게 아닌가! 나는 사태가 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헐레벌떡 캐시레지스터가 있는 곳 까지 뛰어가 점원에게 화장실이 어디 있는냐고 물었다. 점원이 손으로 에스컬레이터 쪽을 가르키며, 아래층 카다로그 카운터 뒷편에 있다고 했다. 아뿔사, 내가 다른 몰안에 있는 체인상점과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이제는 에스컬레이터를 탈수가 없어 엘레베이터가 어디 있느냐 물으니, 복도 끝 왼쪽모통이에 있단다. 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찾아 어머니를 태우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화장실이 눈에 안 띄었다. 이제 어머니는 완전히 사색이 되어 제 정신이 아니다. 나는 할 수 없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상점 밖 몰 복도로 뛰어 나왔다. 복도 바로 옆에 검은 도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다짜고짜 도어를 열어 보니, 좁고 긴 복도가 상점 길이 만큼 뒤로 쭉 나 있었다. 아마도 밤에 청소를 하거나, 빈 상자등을 내 놓는 공간인듯 했다. 어머니는 벌써 드레스 자락을 허리까지 걷고 계셨고, 나는 말없이 문을 닫고 몰로 나왔다. 얼마되지 않아 어머니가 내 시선을 피하시며 그 문을 열고 나오셨고, 나도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 했다.
어머니와 나는 공범자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서고 뒷서며 도망치듯 몰에서 빠져 나왔다. 어머니는 그 일이 있은 후, 말수가 적어지셨다. 여전히 많은 책들을 읽으셨고 테이프에서 음악을 들으셨으며, 한국 식품점에서 드라마등을 빌려다 보시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으나, 어머니는 내부 어디에선가, 잘 맞춰져 있던 고리 한 개가 엇나가 버린 듯이 조금씩 머뭇머뭇 동작이 늦어지 셨고, 그림자가 없는 사람처럼 어딘지 허하기만 했다. 그 후 채 일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어머니에게 ‘디펜드’라는 성인용 기저귀를 사다드리기 시작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어느덧 10년이 가까워 온다.
내 책상 위 선반에는, 어머니가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계신 사진하나가 놓여있다. 그 하늘하늘, 즐겨 입으시던 불루 드레스를 입은 사진이다.
어머니는 강하면서도 담백한 성품을 갖고 계셨다. 때로는 너무 집요한 면이 있어, 종종 자식들인 우리들을 질리게도 했었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이웃이나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시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날,‘에스컬레이터 사건’은 어머니의 삶에 치명적인 굴곡을 가져온 전환점이 된 것 같다.
누구에게나, 일생을 살다가 어느지점에 도달하면, 더이상 인격체로서 자존감을 가지고 지탱할 수 없게 될, 피치못할 상황이 찾아 올 것이다.
에스컬레이터를 더 이상 탈 수 없게 된 순간이 어머니에겐 그 전환점이었는데, 나에겐 무엇이 그 전환점이 될까, 문득 막막해지곤 한다.
내 앞에서, 지금도 에스컬레이터는 삶의 에너지로 가득찬 분주한 사람들을 넘치게 태우고, 경쾌한 마찰음을 내며 쉬지 않고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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