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웃 영화계는 불황을 거의 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불황기에 호황을 누린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1930년을 전후한 대공황 시기에 극장을 찾은 미국인이 20%나 늘었다는 조사가 있다. 경기침체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지난해 할리웃은 어느 때보다도 많은 대작들을 쏟아냈다.
삶이 고단할 때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영화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고 현실에서 잠시 도피해 본다. 또 영화가 던져 주는 메시지를 통해 잊고 지냈던 성찰의 거울을 다시 꺼내 들기도 한다.
늙은 소와 한 할아버지 농부의 이야기를 다룬 ‘워낭 소리’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독립영화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한국에서 흥행 신기록을 매일매일 새롭게 써 가고 있다. 다소 뜬금없기까지 한 이런 현상은 사회적 분위기와 영화가 지닌 성찰의 힘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는 같은 소재, 같은 스토리라도 시대적 여건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만들어 낸다.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고 지쳐 있을 때 단연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언더독’을 다룬 스토리들이다. 현실세계에서는 강자들이 늘 앞서고 손쉽게 승리한다. 불공평하다고 느끼지만 세상은 보통 그렇게 흘러간다.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이런 부조리와 잠시나마 화해한다. 특히 영화 속 언더독은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쉽게 일체화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이들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가는 것을 보면서 그 인물에 자신을 투영시키고 답답한 현실을 잊는다.
스포츠에 더욱 열광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난 달 명문 피츠버그 스틸러스와 만년 꼴찌 애리조나 카디널스가 맞붙었던 수퍼보울은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퇴물취급 받던 쿼터백이 이끌던 만년 꼴찌 팀이 진출했다는 극적인 요소가 세인들의 흥미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경기 자체도 손에 땀을 쥐게 한 명승부였다.
지난 23일 밤 열린 8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슬럼독 백만장자’가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 등 8개 부분을 휩쓸며 그랜드 슬램을 날렸다. ‘슬럼독’이 하룻밤 사이에 ‘슬램독’이 된 것이다. ‘슬럼독 백만장자’는 언더독 영화의 모든 것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교육이라고는 한 번도 받지 못한 인도 빈민가의 소년이 퀴즈 쇼에서 우승하면서 사랑과 부를 거머쥐는 스토리 자체도 그렇고 이 영화가 단 몇 개월 만에 ‘미운 오리새끼’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한 행로 또한 스토리 못지않게 극적이다.
할리웃 기준으로는 푼돈인 1,300만달러를 들여 만든 이 영화는 완성된 후에도 미국 내 배급사를 찾지 못해 곧바로 비디오 시장으로 직행할 뻔 했다. 그러다 겨우 배급사를 찾아 지난해 11월 10개 극장에서 소규모로 개봉됐다. 이 후의 성공 스토리는 하나의 전설이 돼 버렸다. 미국인 관객들이 싫어하는 자막이 많은데다 인도 배경 영화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최고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생역전의 스토리가 어필하는 보편적인 힘 때문이다. 정서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이런 스토리가 안겨주는 감동은 다르지 않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자말은 거친 삶속에서 부딪히면서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퀴즈 문제를 맞춰나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2005년도에 나온 소설 ‘Q&A’를 원전으로 하고 있다. 소설을 쓴 비카스 스와루프는 집필 동기를 이렇게 털어 놓은 적이 있다. “현실의 TV 퀴즈 쇼 우승자는 언제나 예측 가능하다. 이를 한번 비틀고 싶었다.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인생이라는 퀴즈 쇼에서 필요한 것은 지식인들의 두뇌가 아니라 아이들이 생활 속에서 체득하는 지혜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스와루프가 밝힌 동기는 “가난한 아이들은 새삼스레 가르칠 필요가 없다. 가난이 이미 아이들에게 가르쳐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했던 루소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스와루프는 언더독의 성공 스토리를 통해 현실에서는 체험하기 힘든 판타지를 독자들에게 한번 맛보게 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제대로 비틀어댔다.
‘슬럼독’을 본 후 인생이 바뀌었다고 고백하는 관객들까지 있는 것을 보면 이 영화에는 단순한 오락적 재미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있다. 삶속에서 부딪히며 깨닫고 배우는 지혜의 소중함이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요즘 모두들 공부 하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