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전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고지를 누가 점령하고 있느냐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상대를 내려 보고 싸우는 쪽과 언덕을 올라가며 싸우는 쪽 중 누가 유리할 지는 물어보나 마나이기 때문이다.
고지 중에서도 전략적으로 요충에 위치한 곳을 ‘통제적 고지’(commanding heights)라 부른다. 이 말은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레닌이 사유 재산을 일부 허용하는 ‘신 경제 정책’을 펴며 국가가 모든 재산을 소유할 필요 없이 경제의 ‘통제적 고지’만 점령하고 있으면 사실상 경제를 장악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면서 유명해졌다. ‘통제적 고지’는 대니얼 예긴과 조셉 스타니슬로가 쓴 정부와 시장과의 싸움을 다룬 베스트셀러 제목이기도 하다.
레닌은 국가 경제를 좌우하는 주요 요소로 대규모 공장, 은행, 무역, 운송 등을 꼽았지만 그 중에서도 키는 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금융업이다. 어떤 산업 분야를 막론하고 돈 없이는 꾸려나갈 수 없으며 그 돈줄을 쥐고 있는 것이 금융기관이기 때문이다. 금융을 장악하고 있는 손이 경제를 쥐고 있다.
이 금융업이 개인의 손에 맡겨져 있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경제에 이상이 생기면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이 금융 분야다. 그리고 금융에 온 타격은 머지않아 실물 경제로 퍼져 나가 개개인의 일상생활에 파급 효과를 미치게 된다.
1929년 주가 폭락 후 불안해진 개인들이 은행으로 달려가 돈을 빼면서 은행들의 줄도산이 이어졌다. 그 뒤를 이어 돈줄이 막힌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고 이로 인해 직장을 잃은 실업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90년대 일본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주가와 부동산이 동시에 폭락하면서 이를 담보로 돈을 빌려줬던 은행들의 악성 부채가 폭발적으로 불어났고 이것이 걸림돌이 돼 기업들의 돈줄이 막혔으며 이로 인해 중소기업의 도산이 줄을 이었다.
일본 정부는 처음부터 악성 부채의 규모를 밝혀 회생 불가능한 은행과 부실 채권을 정리하는 대신 찔끔찔끔 문제 해결에 미미한 액수의 지원을 통해 이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정책을 폈다. 10여 년이 지나도 경제가 살아날 조짐을 보이지 않자 2003년에 들어서야 엄격한 감사를 통해 부실 채권을 정리하고 주요 은행을 국유화했으며 구제 불능 은행을 도산시켰다. 그제서야 일본 경제는 성장세로 돌아섰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 8,000억 달러에 달하는 경기 부양안이 사실상 확정되고 이와는 별도로 1조에서 2조 달러에 달하는 제2의 구제 금융안이 추진되고 있는데도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다. 월가의 은행 지수는 올 들어서만 30%가 추락했다.
한인은행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올 초 대비 중앙은 50%, 나라는 70%가 폭락했다. 한미, 나라, 중앙 등 한인 주요 은행들 모두 주당 1~3달러 대를 오르내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 은행은 평균 잡아 지난 3~4년 사이 시장 가치의 90%를 까먹었다. 윌셔만 유일하게 6달러 대를 지키고 있지만 최고치에서는 70% 떨어진 상태다. 한 때 선망의 대상이던 이들 은행 이사들은 사실상 재산을 거의 날리고 패닉을 지나 허탈 상태에 빠져 있다. 이들 4대 은행주 폭락의 여파로 날아간 돈만 20억 달러에 달한다.
진짜 문제는 이사들이 아니라 은행주의 폭락이 한인 사회와 미국 경제에 던지는 메시지다. 금융업이 살아나지 않으면 경제는 회복되지 않는다. 은행주들이 이처럼 맥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은 투자가들이 앞날을 비관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다. 오바마 행정부가 부실 채권과 은행을 정리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획기적인 조치를 내놓지 못한다면 미국 경제는 20년째 지지부진한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팀 가이트너 재무장관이 추가 구제 금융안을 발표한 지난 10일 다우 지수는 300 포인트 이상 폭락하는 것으로 답했다. 정부가 실망스런 대책만 자꾸 내놓을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지리라는가에 대한 경고이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다. 시기를 놓치면 지금 호미로 막을 것을 나중에는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 오바마 행정부의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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