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사서 출신이라 장사하는 것은 앞날의 그림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시댁도 상업과는 연관이 없었고 나의 삶과도 거리가 멀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장사를 남편이 박사과정 유학을 오는 바람에 어떨 결에 시작하였다. 그 세월이 어느덧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빚지지 않고 말아먹지 않고 여태 꾸려나가고 있다. 성정이 소심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부탁하는 소리, 아부하는 소리를 못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편이라 친구도 별로 없는 사람이 딴에는 무던히도 노력하여 지금까지 책방의 책장 사이를 오가고 있다.
아무리 생계를 위해서라지만 20년 동안 장사를 붙잡고 있다면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성격도 변하여 손님들과 대화하는 단계를 넘어 수다를 떠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 그렇지만 아직도 마음 한 편으로는 오로지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갈망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그럴 때 훌쩍 떠나서 커피 마시며 사색하고 노는 장소는 노튼 사이먼 뮤지엄 안마당 정원과 게티 뮤지엄 야외 카페 등 가까운 뮤지엄이다.
살며시 앉아서 나무들 사이로 멀리 보이는 집들과 하늘과 구름을 쳐다보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의 감촉을 느끼는 시간을 좋아한다. 그런 순간에는 행복감이 넘쳐서 ‘아, 이곳이 바로 천국이구나’하고 감격한다.
무료해지면 갖고 다니는 책의 책장을 넘긴다. 눈이 피로해지면 다시 먼 곳, 가까운 곳의 풍경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렇게 몇 날이고 끝없이 혼자 앉았어도 행복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2008년 12월31일 정오, 그해 마지막 선물을 나 자신에게 주었다. 노튼 사이먼 뮤지엄 정원 카페에서 점심식사로 따뜻한 커피와 제일 비싼 샌드위치를 한 해의 보답으로 선물했다. 패사디나의 콜로라도 길은 다음날 있을 로즈퍼레이드 관람 스탠드 설치로 분주했다. 미술관 안은 평소보다 붐비지 않고 한산하여 그림 감상과 산책하기에 더 없이 좋았다.
뮤지엄 정원 산책로 제일 먼 곳 거대한 여인 나상 조각작품 옆 시든 잎들 사이로 한 송이 보랏빛 수선화가 시절을 잊고 피어 나를 반겼다. 조금 더 가니 베어낸 곡식의 남겨진 이삭처럼 자그마한 연분홍 연꽃이 연못 위에 홀로 보일락 말락 숨어 피어 있어 마치 겨울날의 특별한 보물을 발견한 듯 기뻤다. 4월이면 만개한 꽃들의 갖가지 색과 향기로 노튼 사이먼 정원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발하겠지만 겨울날의 정원 산책도 나름의 정취가 있었다.
미술관에는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비싼 고흐, 세잔, 렘브란트, 쿠르베, 드가 등 거장의 걸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화가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깨우친 인생에 대해서 그림으로 설명한다. 그림이 없어지지 않는 한 대를 이어 우리에게 말해 줄 것이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때로는 정답고 때로는 철학적이고 때로는 달콤하기까지 하다. 삶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일 때도 분명 있다고도 말한다.
금싸라기보다 더 비싼 그 그림의 주인이 누구인가. 그림은 순전히 감상하는 자의 소유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시간은 이 세상 최고의 부자가 된다. 불후의 걸작을 통하여 누리는 만족과 위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기에 그림 값이 지나치게 비싸다는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충동적으로 나선 점심 나들이는 아마도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이 불러낸 것이었을까. 그 날 눈길을 오래도록 사로잡은 그림은 동쪽 끝 워싱턴 뮤지엄에서 비싼 비용을 들여 나들이 나온 베르메르의 ‘글을 쓰는 여인’(A Lady Writing)이란 제목의 그림이었다. 베르메르의 그림이 주는 느낌은 밝고 화사한 가운데 누리는 고요함, 정겨운 침묵, 깊디깊은 집중 등이다. 그 세 가지의 정갈한 감상이 아직도 마음의 한 자락을 잡고 있다.
침묵과 고요 속에서도 화사함을 잃지 않고 집중하여 삶의 매순간을 붙잡으라고 나직한 목소리로 화가는 속삭인다. 시끄러운 삶의 소소한 부산물에는 침묵으로 초연하여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렇듯 ‘혼자 놀기’의 나들이로 우연히 만난 한 점의 그림 감상이 변수가 많은 올해를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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