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에서는 곧 눈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고 바람은 뺨과 귓불을 마구 때리듯 차갑게 불어대는 날, 불현듯 까마득한 설 명절 즈음의 첫 기억이 떠오른다. 이 추위보다 열배나 더 추웠던 겨울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고향집에서는 설날의 보름 전 쯤 포근함이 깃든 날을 잡아서 고방의 오동나무 궤짝에 든 놋그릇을 모두 꺼내놓는다.
우물가에 멍석을 깔고 앉아 짚수세미에 재를 묻혀서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유기그릇을 닦는 것으로 설맞이의 준비가 시작된다. 손님맞이용 놋그릇을 깨끗하게 닦고 씻어 무명행주로 물기를 없애 정갈하게 찬장에 쌓아두는 모습이 설맞이의 첫 풍경으로 기억된다.
설 이레 전쯤에는 증조모를 비롯한 조모, 출가하지 않은 고모 셋, 신혼의 큰삼촌 내외, 작은 삼촌, 청상이 되어 딸을 데리고 친정살이로 돌아온 맏고모, 언니 둘, 오빠와 나, 여동생, 남동생 이렇게 한집에 사는 친 가족만 부모님을 포함하여 열여덟 명의 설빔을 조모는 장만하셨다. 같이 살면서 집 안팎의 일을 돕는 아재와 아지매들의 설빔도 물론 빼놓지 않으셨다.
올망졸망 어린 우리들을 위하여 어른들은 설 치레로 장에서 최고 품질의 옷과 신발을 아들 딸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장만해주셨고 그러한 집안의 내림을 물려주신 것을 내가 세상물정을 깨우치자 곧 알게 되었다. 아마도 살림을 주관했던 조모의 뜻이었을 것이다. 설날 입으려고 장롱에 넣어둔 새 옷과 새 신을 하루에도 몇 번 씩 꺼내어 입어보면서 새해를 손꼽으며 기다렸다.
설 이틀 전 어머니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차례로 부엌으로 불러들여 검정 무쇠 가마솥에 장작불로 물을 끓여가며 목욕을 시켰다. 때를 모두 벗긴 후 두 세 바가지의 물로 마지막 헹구어낼 때는 상쾌했고 아궁이에 타오르는 노란 장작불로 따뜻했다.
그믐날 밤에는 깨어서 온밤을 지새우며 새해를 맞이해야지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변한다고 어른들이 겁을 주었지만 어린 우리들은 끝내 졸음을 참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얼른 거울을 보며 눈썹이 그대로 까맣게 있는 것을 확인하곤 ‘아, 올해는 운이 좋아서 눈썹이 변하지 않았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차례를 지낸 후 집안의 제일 웃어른부터 순서대로 세배를 드리면 어른들은 세뱃돈과 한 해 동안 건강하고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주셨고 각 사람마다 새해에 꼭 이루어야 할 일들을 함께 빌어주셨다. 이웃에 사는 일가친척들께 세배를 드리러 갈 때 어머니는 우리 손에 정종 병, 버선, 양말, 고무신 등속을 쥐어주며 어른들께 세배 드리기 전에 드리라고 일러주었다.
아녀자들은 손님들을 다 치르고 난 저녁나절에 세배를 다녔는데 그때 댓돌 위에는 손님들이 신고 온 열댓 켤레의 흰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전등도 달도 없는 어둠속 호롱불 아래서 손님들은 모두 자기 신발을 잘 구별하여 찾아 신으셨다.
이렇듯 그 시절의 설날은 새 해, 새 날, 새 아침, 새 옷, 새 신발, 새로운 시작, 새 소망 등 푸짐한 먹거리를 더해 일년 중 가장 기쁘고 즐겁고 가슴 벅차게 맞이한 날이었다. 유년의 설날처럼 설레며 맞이한 새해는 다시 올 것 같지 않다.
올해는 그 설렘을 기억하며 그때처럼 ‘새해’를 이 세상에 정말 새롭게 온 나의 ‘새해’로 여기며 살아볼 작정이다. 그것이 할머니로부터 내려오는 자손들에 대한 그분의 소망에 대한 보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덧 살이 채 되기 전에 돌아가신 기억도 가물가물한 조모는 나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시다. 조모께서 나를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지에 대하여 조모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나의 성장기 내내 말하곤 했기에 그분들을 통하여 조모의 사랑을 느끼고 내 존재가 대단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부드럽고 포근한, 사랑을 받는 느낌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내는 원동력의 하나가 되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세월이 흐를수록 빠르게 발달해 온 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지만 그 만큼, 아니 준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앗아갔다. 힘을 합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농경사회의 더불어 살아가는 오순도순 한 맛을 빼앗아 갔다는 상실감을 세모의 회상을 통하여 강하게 느낀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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