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us horribilis. 왕실은 스캔들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거기다가 윈저 성에 화재까지 발생했다. 그 해, 1992년을 돌아보면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는 라틴어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Annus horribilis.(무서운 해)’라고.
’annus horribilis’ 올해 따라 이 말이 자주 눈에 뜨인다. 새해다. 희망찬 전망에 덕담이 오가야할 새해 벽두다. 그러나 쏟아지느니 온통 암울한 전망이다.
“실업대란이 우려된다. 집값은 더 떨어지고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의 위치는 크게 흔들릴 것이다. 70년래 최악의 경기다….” 경제전망들은 하나같이 비관적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굿 뉴스는 별로 없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그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충돌로 중동사태는 새로운 긴장국면을 맞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에도 전운이 감돈다. 뭄바이 테러 여파다. 이란, 북한의 핵 위기도 여전히 해결기미가 없다.
모든 게 어둡다. 국내 이야기든, 국제 정세든. 내다보기조차 무서운 해가 2009년인 것이다. “지난해 세계는 다극화 방향으로 큰 움직임을 보였다. 그 흐름은 올해 들어 더 가팔라질 것이다.” 중국 신화사통신의 주장이다. 미국 시대는 끝났다는 우회적 표현이다.
러시아에서 나오는 주장은 더 극단적이다. “미국은 내전을 겪은 뒤 분열상황을 맞을 것이다.” 미국의 경제, 금융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정치, 사회적 위기가 심화돼 2009년 가을께 미국에서 내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KGB 출신의 러시아 대학교수가 내놓은 전망으로, 다분히 희망적 관측 같이 들린다.
하여튼 미국으로서는 극도의 상실감을 맛본 해가 지난해다. 그 상황에서 새해를 향해 한 가지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뒷받침해온 미국의 군사력이 위축될 때 도대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반세기 이상 지속된 한반도 평화는 미국의 군사력 덕분이다. 일본의 안보도 그렇다. 유럽의 경우도 다를 게 없다. 소련과의 냉전에서 유럽을 지켜낸 것은 다름 아닌 미군이다. 냉전은 끝났다. 그러면 미군은 그 역할을 다 끝낸 것인가. 답은 ‘노’다.
권위주의 형 독재체제 러시아는 군사대국을 지향하고 있다. 여전히 위협적 존재다. 아시아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미군이 없을 경우 대만은 당장 중국의 공격목표가 될 수 있다. 한반도도 극히 위험해진다.
미군은 중동지역에서도 안보의 주춧돌 역할을 한다. 미군이 없다고 가정할 때 우선 타격을 받는 것은 석유 수송로다. 거기다가 대재난 발생 시 가장 먼저 파견되는 것이 미군이다. 미군의 지원 없이 대규모 인명 구조작업이나,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미군이 어느 날 사라졌다.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 아마도 로마제국 붕괴 후 유럽과 방불하지 않을까. 야만족 침입으로 곳곳이 초토화 된다. 암흑세상이 된 것이다.
회교원리주의 테러집단은 말하자면 현대판 바이킹이다. 그 때와 다른 것은 오늘의 야만집단은 한 도시를 순식간에 멸절시킬 수 있을 정도의 가공할 살상력을 지닌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전혀 망상으로만 치부될 수는 없다. 미국은 몹시 지쳐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라크 전쟁으로 극도의 피로감을 보여 왔다. 그 상황에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일종의 합병 증세마저 보이고 있다.
미국은 황혼기를 맞이했다는 좌절의식에, 쇠퇴감과 무기력증 만연이 그 증세다. 이 ‘미국병’은 2009년에 더 악화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거기에 피로감만 계속 가중될 때 미국은 고립주의로 빠져들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대안 세력도 없다. 그 상황에서 미군은 사라진다. 그 때야 말로 세계는 ‘annus horribilis’- 말 그대로 ‘ 무시무시한 해’를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새해를 바라보는 시각은 그러나 반드시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2009년은 진정한 의미의 21세기 원년이 될 수 있다. 뉴욕타임스의 E. J. 디온 주니어가 내린 전망이다.
한 시대의 종언과 새 시대의 시작은 캘린더가 제시하는 시간표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20세기가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보는 것처럼 21세기의 시작은 2009년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그 상황을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행동양식으로 대처할 때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신사고(新思考)의 오바마 정부 출범에서 그 희망을 본 것이다. 그 희망에 기대를 걸어본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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