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순환하느냐 전진하느냐는 역사가들 간의 오랜 논쟁거리다. 동양적인 사관은 대체로 순환론이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나라가 일어났다 망하지만 그 흥망성쇠의 과정은 비슷하다. 폭군이나 내시, 간신배가 나라를 어지럽힌다. 천명을 받은 영웅이 나타나 새 나라를 세운다. 한 동안 잘 나가던 새 나라도 다시 폭군이나 내시, 간신이 나타나 다시 망쳐놓는다. 또 다른 영웅이 나와 나라를 세운다. 수 천 년 동안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누구도 순환론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대조되는 것이 서양의 발전사관이다. 모든 발전사관의 뿌리는 유대-기독교 문명의 역사관이다. 타락한 세상에 메시아가 출현해 인류를 구원하며 선택받은 자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역사 인식 속에 순환론이 끼어 들 여지는 없다.
어느 쪽이 맞을까. 세계 역사의 무대에 숱한 나라가 출현했다 사라진 점을 감안하면 순환론 쪽이 설득력이 있지만 새로 태어난 나라가 망한 나라와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는 발전론이 일리가 있다. 순환론의 원조 중국만 보더라도 한나라는 청나라와 인구와 기술력, 축적된 부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또 같은 나라라도 초창기와 나중의 사회 경제적 수준은 같지 않다.
결국 역사는 나선형으로 움직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같은 사이클을 반복하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길게 보면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마크 트웨인은 ‘역사는 반복하지 않고 라임한다’(History does not repeat itself; it rhymes)라고 말했다.
경기 사이클도 마찬가지다. 불경기와 호경기가 반복되지만 한 사이클이 지나고 나면 경제 수준은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와 있다. 1930년대 대공황은 미 역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였지만 제2차 대전과 함께 불황이 끝난 후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은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1970년대의 불황은 대공황 이래 최악이었지만 이 또한 80년대 초 끝나고 90년대 말까지 미국인들은 20년 가까운 장기 호황을 경험했다.
이는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버블의 원조로 불리는 1637년 튤립 버블 붕괴 이후 네덜란드는 심한 경제 위기를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17세기 내내 세계 바다를 누비며 상권을 거머쥐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 최고의 선진국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했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막강했다. 네덜란드의 주요 경쟁국이던 영국은 그와 싸워 번번이 참패했다.
영국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세계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것은 1688년 영국 왕 제임스 2세의 사위 네덜란드 윌리엄 오렌지 대공이 소위 ‘명예혁명’이란 이름으로 반란을 일으켜 영국을 접수하면서부터다. 네덜란드야말로 영국 부흥을 가져온 영국의 스승인 셈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한창 뜨던 무렵인 1720년 양국을 동시에 강타한 남양 버블과 미시시피 버블은 두 나라 경제를 일시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멋모르고 남양 버블에 투자했다 전 재산을 날린 아이작 뉴턴은 “천체의 움직임을 아는 내가 인간의 광기를 몰랐다”며 한탄한 후 그의 생을 마칠 때까지 다시는 주식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앞에서 ‘남양’ 얘기 꺼내는 것조차 금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이를 극복하고 유럽의 최강자로 다시 태어났다.
버블은 발전 가능성이 있는 나라에서 일어난다. 아무 희망도 없는 나라에서는 버블이 싹틀 여지조차 없다. 구 공산권이나 북한에서 버블이 피어났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지금 미국은 주택 버블이 터지면서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아무리 어려운 경제 위기가 오더라도 이를 이겨내고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준다. 호황 뒤 찾아오는 불황은 장기 호황이 가져온 나태와 비능율, 낭비를 고치라는 신호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전진의 역사다. 예상을 뒤엎고 미국인들이 올 대선에서 흑인 후보를 차기 지도자로 선택한 것도 온갖 좌절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는 증거다. 코앞에 닥친 고통에 주눅들지 말고 ‘담대한 희망’을 품에 안고 새해를 맞자.
민경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