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전 500년 전후 페르시아는 막강했다. 지금의 중동지역을 석권했다. 황제 다리우스는 보스포로스 해협(지금의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해협) 서쪽의 스타르타와 아테네를 넘봤다. 그는 굳이 피를 흘리지 않고 둘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두 나라에 사신을 보내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내적으로는 그리스의 패권을 다투면서도 외적에 대해서는 단결해 대항하곤 했다. 페르시아의 사신은 우물에 수장됐다.
다리우스 황제는 격노했다. 친히 군사를 이끌고 그리스 군기잡기에 나섰다. 기록에 의하면 다리우스 황제가 총사령관을 맡고 다티스 장군과 아르파페르네스 장군이 사령관을 맡은 페르시아군은 전함만 600척에 보병 10만, 기병 1만 대군이었다고 한다. 페르시아 대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그리스의 동해안에 상륙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이자 서양문화의 요람인 그리스 반도는 쑥대밭이 될 위기에 놓였다.
민주의 나라 아테네는 죽기로 싸우기를 결의했다. 전사의 나라 스파르타는 몸을 사렸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동반출병 요구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응하지 않았다. 당시 아테네 정부의 명을 받들어 스타르타까지 왕복뜀박질로 전령노릇을 한 사람이 마라톤의 기원에 나오는 필리피데스다.
아테네는 도리가 없었다. 페르시아대군에 항복하든지 결연히 맞짱을 뜨든지 둘 중 하나였다. 아테네는 맞짱을 택했다. 말티아데스라는 장군을 사령관으로 1만 기병대를 맡겨 맞싸우게 했다. 말티아데스는 영리했다. 페르시아대군이 광활한 사막전투에 능숙한 대신 굴곡진 산악전투에 서툰 점에 착안, 말티아데스 사령관은 아테네 기병대를 아테네 동북쪽 마라톤평원 언저리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적을 맞았다. 페르시아군은 태평하게 평원을 지나다 사방팔방에서 느닷없이 달려든 매복 기병대에 속절없이 당했다. 필리피데스도 전투에 참가했다. 말티아데스 사령관은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승전보를 조금이라도 빨리 전하기 위해 필리피데스를 보냈다. 필리피데스는 쉬지 않고 아테네까지 달렸다. 임무완수 외마디를 남기고 그는 숨을 거뒀다. 아테네군이 승리했다.
◇기원전 490년 막강 페르시아와 소국 아테네가 벌였던 마라톤전쟁의 줄거리다. 마라톤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우선 이름이 그렇고, 마라톤의 거리 42.195km는 필리피데스가 뛰어갔다고 추정되는 마라톤평원에서 아테네까지의 거리다.
마라톤전쟁이 역사적 사실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필리피데스 이야기의 진정성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당시 아테네군은 기병대였는데 필리피데스가 굳이 말을 타지 않고 아테네평원에서 아테네까지 뛰어갔다는 건 아무래도 수상쩍다. 아테네의 승전과 필리피데스의 영웅성을 드높이기 위해 후세에 그렇게 각색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무튼 마라톤전쟁은 아테네와 그 후예 그리스에겐 두고두고 또 들추고픈 영광의 역사가 됐고, 페르시아와 그 후예 이란에겐 다시는 들추고싶지 않은 상처의 역사가 됐다. 전쟁의 추억, 그 빛과 그림자는 마라톤에 대한 태도까지 상반되게 만들었다. 그리스는, 비록 마라톤강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여전히 마라톤을 국가적 민족적 긍지의 스포츠로 여긴다. 이란에서 마라톤은 금지된 불장난이다. 올림픽이든 아시안게임이든 다른 대회든 일체의 마라톤 레이스에 이란 국가대표를 출전시키지 않는다. 실은 마라톤 국가대표 자체가 없다. 아마도 마라톤이란 이름이 사라지기 전까지 이란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외롭고 힘겨운 레이스, 그래서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종목으로 일컬어지는 마라톤은 1896년 근대올림픽 창설대회(제1회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남자 100m 달리기와 함께 올림픽의 꽃으로 자리잡았다. 올림픽이 올해 베이징 대회까지 4년 주기로 100년 이상 열리면서 마라톤월계관을 차지한 코리안은 2명이었다. 일제하인 1936년 열린 베이징올림픽 때 손기정 선수가 일본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차지했고, 그로부터 56년만인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비로소 대한건아의 이름으로 월계관을 차지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이봉주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유럽선수권 등 몇 년 주기로 열리는 빅 이벤트 말고도 마라톤 대회는 연중 세계 곳곳에서 열린다. 한국에서는 동아마라톤과 조일마라톤이 매년 열린다. 미국에서 열리는 보스턴마라톤 시카고마라톤 뉴욕마라톤은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대회다. LA마라톤은 이들 세 대회에 비해 급수가 낮은 편이다. 이밖에도 샌프란시스코마라톤 빅서마라톤 등 지역마다 크고작은 마라톤대회가 있어 한인 마라톤매니아들도 자주 입상한다. 일본에서는 2월에 열리는 오이타-벳푸마라톤, 12월에 열리는 후쿠오카마라톤이 유명하다. 독일의 베를린마라톤, 네덜란드 로테르담마라톤, 영국의 런던마라톤 등도 세계적 건각들이 탐을 내는 대회들이다.
마라톤대회의 권위가 서려면 무엇보다 세계적 마라토너들이 많이 출전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상금이 많아야 한다. 마라톤은 오늘 뛰고 내일 또 뛰는 게 아니다. 한번 뛰면 대개 서너달 다시 뛰기 어렵다. 때문에 같은 값이면 큰돈을 걸어야 월드스타 마라토너들을 대거 유인할 수 있다. 또 있다. 기록생산성이다.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코스가 완만하고 맞바람이나 옆바람이 적고, 기온이 적당히 쌀쌀하며, 레이스 도중 기온변화가 크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상금 두둑하고 기록내기 좋으면 마라토너들은 몰려들게 마련이다. 로테르담마라톤이나 런던마라톤 보스턴마라톤 등에 밀려 2류 취급을 받았던 베를린마라톤에 수퍼스타 마라토너들이 몰리고 세계기록이 양산되는 것이 좋은 예다.
◇매년 12월 중순에 열리는 호놀룰루마라톤은 2류 내지 3류에 속한다. 우선 상금이 많지 않다(1등 4만달러). 코스는 그럭저럭 좋은 편인데 날씨가 워낙 험하다. 거센 바닷바람 때문에 호기록을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게다가 수퍼스타 마라토너들은 한시즌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시즌에 대비하는 시기다. 때문에 호놀룰루마라톤에는 주로 2진급 선수들이 출전해 기량을 겨루고 가능성을 타진한다. 국민마라토너 이봉주 선수도 신인시절 호놀룰루마라톤에서 우승하면서 황영조 그후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호놀룰루마라톤은 하와이관광을 겸해 뛰면서 즐기는 세계각국 마라톤애호가들이 즐겨찾는 대회이기도 하다. 대개 일본계이기는 하지만 수만명의 시민마라토너들이 참가한다.
올해 대회는 지난 14일(일) 열렸다. 이번에도 약 2만5,000명이 출전해 걷다 뛰다 러닝관광을 즐겼다. 경기불황 여파에다 대회당일 폭우예보까지 겹쳐 예년보다 훨씬 줄어든 숫자다. 쓰카하라 야스시라는 일본의 7세 소년이 호놀룰루마라톤 풀코스를 6시간45분35초만에 완주, 세계언론을 탔다. 산케이신문 등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만 7세 생일상을 받은 쓰카하라는 난생 처음 도전한 이번 레이스에서 어른들 틈에 끼여 완주한 뒤 끝까지 달릴 수 있어 기쁘다. 내년 대회에도 참가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번 대회에서 화제에 오른 또 한명의 선수는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계투요원으로 활약하는 일본인 투수 오카지마 히데키다. ML 2년차인 올해 3승2패1세이브(평균자책점 2.61)의 준수한 성적을 올린 덕분에 내년까지 계약이 자동연장(연봉 175만달러)된 오카지마는 구단측에 알리지 않고 이 대회에 출전했는데 기록은 7세 마라톤신동보다 다소 앞선 6시간15분대로 저조한 편이었다. 대회 직전 이 소식을 보도한 보스턴 글로브지는 만약 그같은 사실을 알았다면 오카지마를 말렸을 것이라고 구단측의 탐탁찮은 심기를 전하기도 했다.
이 대회에서 남녀우승은 패트릭 이뷰티(케냐/2시간14분35초)와 시미하라 기요코(일본/2시간32분36초)가 각각 차지했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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