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체급 석권 ‘골든보이’ 오스카 델 라 호야
아시안 최초 5체급 챔피언 매니 파키아오
6일(토) 저녁 라스베가스 MGM 주먹한판
◇로키 마르시아노,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 조 프레이저, 로베르토 두란, 마빈 헤글러, 피피노 쿠에바스, 토마스 헌스, 슈가 레이 레너드, 카를로스 몬존, 윌프레도 베니테스, 헥토르 카마초, 오스카 델 라 호야, 알폰소 사모라, 카를로스 사라테, 윌프레드 고메스, 미겔 칸토, 구시켄 요코…. 서강일, 김현치, 허버트 강, 유제두, 홍수환, 염동균, 구상모, 오영호, 박종팔, 박찬희, 김태식, 김성준, 김환진, 유명우….
프로복싱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먹들, 골수 복싱팬들에게 이들은 불러도 대답없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들이다. 대개는 늙었고 더러는 세상을 떴다. 골수 복싱팬들의 군침은 여적 마르지 않았는데 거기에 맞춰줄 호걸주먹들은 도통 뜨지 않는다.
ESPN은 이런 피끓는 소수를 위해 ESPN 클래식 채널을 통해 신물이 나도록 자주 옛날옛날 녹화테입을 틀고 틀고 또 튼다. 요즘 경제난 때문에 부쩍 세인들 입에 오르내리는 1920년대말 1930년대 중반 대공황기에 야외 특설링에서 주먹다짐 우격다짐을 벌이는 장면을 담은 ‘비 내리는 흑백필름’들도 수시로 수퍼고화질 21세기형 TV화면을 탄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고 프로로 전향한 무하마드 알리가 소니 리스튼을 까부수고, 조 프레이저를 작살내고, 조지 포먼을 때려부수던 전성기와 레온 스핑크스 같은 ‘얼라들’에게까지 샌드백 노릇을 하던 은퇴직전 말년기 동영상이 엊그제 일처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주먹싸움에 관해서라면 지구촌에서 수년동안 그를 당할 자가 없었는데, 지금 그는 나비처럼 날았던 몸도 벌처럼 쏘았던 주먹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60대 환자(파킨스씨병)가 돼 있다.
스타복서든 무명복서든 나이 들어 힘 빠지면 사각의 정글에서 사라진다. 제 발로 내려가든 늘씬 얻어맞고 쫓겨나든,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정글에선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이 지배한다. 그런데 요즘 프로복싱의 문제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정글 자체가 죽어가고 있다. 한마디로 장이 서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일까. 프로복싱의 인기가 시들하니 큰손 스폰서들이 외면한 것일까, 큰손 스폰서들이 외면하니 짜릿한 주먹들의 출현이 뜸해지고 덩달아 프로복싱의 인기가 시들해진 것일까. 이유야 뭐든 이것만은 분명하다. 프로복싱은 거의 죽었다. 살아날 가망도 거의 없다. 그 북적거렸던 프로복싱 시장은 이제 비까번쩍 수퍼마켓들에 밀려 인적 드문 공터로 변한 재래식 저잣거리처럼 돼버렸다. TV에서도 푸대접이다. 좋았던 그 시절엔 빅매치가 열리면 황금시간대 드라마고 뉴스고 뭐고 제쳐놓고 복싱을 중계했고, 라디오도 동시중계까지 했다. 한국에서는 금요권투니 일요권투니 해서 위클리 고정 프로그램에 들었다. 요즘은 턱도 없다. 미국에서도 주요 공중파에서 밀려나 ESPN 말고는 HBO 등 유료채널에 접속해야 겨우 복싱구경을 할 수 있을 정도다.
다시 한국의 복싱황금기로 시간표를 돌려보자. 유제두 홍수환 염동균 등이 날리던 1970년대 세계챔피언이 된다는 건 부자되는 길이었다. 당시 서울의 보통동네 집 한채에 기백만원 하던 시절, 세계챔피언이 되면 이천만원 삼천만원을 받고 광고수입에다 후원금에다 가외의 뭉칫돈까지 벌었다. 복서들은 그래봤자 프로모터나 매니저몫 떼주고 뭣 떼주고 하면 얼마 안남는다 했지만 그러고 남은 몇백만원만 해도 몇백원 몇천원에 목마른 가난한 청소년들에겐 꿈같은 유혹이었다. 서울 등 대도시 곳곳에 복싱도장들이 즐비했다. 도장마다 대개 벌이가 쏠쏠했다. 남산순환도로나 구로공단 옆 안양천 뚝방길에는 새벽마다 밤마다 킁킁 콧김에 맞춰 원투를 뻗으며 이를 악물고 비지땀을 흘리는 ‘복싱으로 해뜰날 지망생’들이 부지기수였다. 일 나가기 전에 혹은 일 마친 다음에 그들은 그렇게 복싱으로 꿈을 키웠다.
그 시절 상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2007년 8월, 그러니까 작년 여름에 있었다. WBC 페더급 세계챔피언 지인진이 세계타이틀을 자진 반납한 것이다. 한국타이틀도 아니고 동양타이틀도 아니고 세계타이틀을, 옛날 같으면 그냥 몇대 맞고 쓰러지기만 해도 떼돈을 벌었을 세계챔피언 벨트를 지인진이 거저 내놓은 이유 역시 돈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신 돈되는 K1(이종격투기)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한다.
◇오스카 델 라 호야. 남가주 태생의 멕시코계 수퍼주먹.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열아홉살 금메달리스트가 된 뒤 프로로 전향해 승승장구하며 6체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골든 보이’다. 이제는 삼심대 중반이 된 그가 거의 거덜난 사각의 정글에 오른다. 오늘(6일) 저녁 라스베가스 MGM 그랜드 호텔 특설링에서다. 42전 38승(29KO) 4패. 복싱 시장이 황폐해지기 직전 마지막 호황기 최고스타 중 한명이었던 그는 그렇게 번 돈을 불리는 데도 수완을 발휘했다. 앨범을 내고 축구팀 공동구단주가 되는 등 별별 끼를 다 발산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다시 링에 오르는 까닭은? 넘치는 돈에 또 돈이 필요한 것일까. 복싱이 별로 돈 안된다는 건 그가 더 잘 안다. 그렇다면 주먹사나이의 주먹본능인가. 정글의 주먹왕은 그냥 그대로 잊혀지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스타일상 그의 파괴본능이 유난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는 좀체 피튀기는 근접전을 하지 않았다. 빙글빙글 돌면서 기회를 노리거나 이때다 싶으면 엉키면서 맥을 끊기 일쑤였다. 화끈한 푸닥거리를 바라는 팬들에겐 그닥 매력적인 복서가 아니었다.
아무튼, 그의 상태는 필리핀의 영웅 매니 파키아오다. 델 라 호야보다 다섯살 어린 서른살이다. 스타일은 엄청 터프하다. 아시아인 최초로 5체급 챔피언에 오른 강자다. 47승(35KO) 3무2패.
12라운드로 예정된 둘의 일전에는 세계타이틀이 걸려있지 않다. 체급은 웰터급에 맞춰 싸운다. 문제는 이것이다. 델 라 호야는 대개 그 체급이나 그 윗체급으로 싸워 10파운드정도 감량하면 그만이다. 파키아오는 주로 놀던 물이 그 아래 체급이라 10파운드 이상 올려서 싸우게 된다. 일전을 앞두고는 감량이 상식이다. 체중을 올리면 되레 그 파괴력이 감소한다. 파키아오의 불리가 점쳐지는 이유다. 또 델 라 호야가 9cm가량 크다. 안그래도 거리를 내주지 않고 안전제일 복싱을 하는 그로서는 때리기보다 안맞기에 초점을 맞춰 경기를 풀어나간다면, 파키아오는 사정거리 밖에서 무수히 헛손질을 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파키아오는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다. 대전을 이틀 앞둔 4일 로이터통신과의 회견에서 그는 “나는 라이트급에서 싸울 때도 라이트미들급 미들급 복서들과 스파링을 했다”며 “오스카가 뛰어난 복서임에 틀림없지만 내 스피드와 힘으로 충분이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오스카 델 라 호야는 “체구가 작다고 파워도 없고 스피드도 없을 것이라고 깔보면 모든 것이 꼬인다”며 “킹콩과 대적한다는 자세로 준비했대”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늙고 꾀많은 오스카 델 라 호야의 승리를 점치고 있다. ESPN 복싱전문가 3명은 모두 델 라 호야의 KO승을 내다봤다. 관련보도들을 종합하면 팬들은 승패예상과는 별도로 일단 화끈한 파키아오를 더 응원하는 분위기다. 델 라 호야의 안전위주 복싱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멕시코 복싱팬들마저 멕시코계인 델 라 호야 대신 파키아오를 더 좋아하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2008년 세계 프로복싱 최대매치로 불리는 이 경기 승자는 누가 될까. 그보다는 두 주먹사나이의 대결이 빈사상태의 프로복싱에 하다못해 몇달이라도 활력소가 될 수 있을까.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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