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낭만
“공항에 다 도착했어. 밖으로 나와” 남편의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오니 새벽공기 그것도 한국의 가을아침 냄새가 발걸음을 기분 좋게 한다. 이게 얼마만인가. 차에 짐을 싣고 타려는데 운전석 옆자리에 꽃다발이 하나 놓여있다. “이거 내꺼?” “응.” “이~~야 이거 사느라고 늦게 온거야?” “우리 직원들이 당신 온다고 어제 사줬어” “그럼, 그렇지 당신이 샀을 리가 없지. 그래도 고맙네. 이거 비싸게 줬겠다.” “에구, 누가 아줌마 아니랄까봐 꽃값타령은.” “치, 그래도 공항에 앉아 있으니까 택시아저씨들이 아가씨라고 부르던걸?” 꽃냄새 가득한 차를 타고 서울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 출근시간이라 차들이 얼마나 많은지.
예쁘게 물들어있는 가을단풍이 눈길을 잡는다. “와. 저기 은행나무 봐. 샛노란색이 너무 예쁘다.” 가을가뭄으로 올 단풍이 제일 별로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왜 이리 예쁜지 모르겠다. 가장 좋은 계절에 한국을 왔으니 온통 먹을 것과 볼 것이 풍성하다. 잘 익은 홍시부터 때 이른 귤까지 과일가게 앞에 진열된 과일들도 먹음직스럽고 곳곳에 김이 모락모락 어묵장사들도 아침장사로 분주하다.
피곤한지 어쩐지도 모르고 창가에 얼굴을 들이대고 바깥풍경에 매료되어있다. 집에 짐을 대충 풀고 바로 서울시내로 나섰다. 홍대 앞에 일이 있어 갔는데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변해도 이리 변할 수 있을까. 큰길들은 대충 알겠는데 작은 골목사이사이로 카페며 음식점이며 없던 길까지 생겨서 자칫 모르는 길로 들어가면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겠다. 중고등학교를 이 동네에서 다녔는데 왜 이리 낯선 곳처럼 느껴지는지.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데 우산도 없이 홍대앞길을 한참을 걸었다. 나뭇잎에 빗방울이 맺혀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쳐다보며 너무 신기한 듯 보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정신 나간 여자처럼 물끄러미 쳐다본다. 낮게 깔린 구름도 좋고 가을비도 좋고 사람 사는 모습들도 너무 좋다. 보도 블럭 사이가 맞지 않아 울퉁불퉁한 길을 한참을 걸으니 다리도 아파오고 커피생각도 나서 가까운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한잔을 시켰다. 미국에 있는 왠만한 커피전문점이 서울에도 다 있다. 익숙한 간판들을 곳곳에서 볼 수가 있다.
얼마 만에 누려보는 여유로움인가. 저녁약속까지는 시간이 있기에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동네가 미적 감각이 뛰어난 곳이니만큼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내 눈에는 예술가처럼 보인다. 다들 멋지고 예쁜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가고 있다. 커피를 들이키며 옆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서야 내가 얼마나 초라한지 알 수 있었다. 한국에 나온다고 나름 옷에 신경을 쓴다고 했는데도 어찌나 촌스러운지. 거기다 오랜만에 서울낭만을 누리고 맛본다고 비를 맞아서 머리는 다 주저앉아 있고, 12시간 비행기타고 도착하자마자 바로 나와서 화장은 얼룩덜룩 뭉쳐있고, 환자같은 모습으로 럭셔리커피숍에 앉아 있는 것이다.
‘에구, 주책. 화장이라도 고치고 나올걸.’ 비오는 거리로 다시 나오니 아까보다 더 많은 비가 쏟아진다. 남편이 걱정이 되는지 전화가 왔다. “어디고? 비오는 데 돌아 댕기지 말고 집에 있그라.” “여기 홍대 앞인데 비가 많이 오네. 비를 좀 많이 맞았어.” “서울에서 비 맞고 돌아 댕기는 사람이 어딨노? 여기 내리는 비는 산성비다 산성비! 머리카락 다 빠지니까 비 맞고 댕기지마!”
십년 만에 혼자 낭만이란 걸 느껴 보려다가 완전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다. 추적추적 비오는 거리에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도착했다. 첫날부터 너무 오버를 했더니 피곤하다. 거의 24시간을 꼬박 잠도 않자고 이리 설쳤으니 몸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이팔청춘이라고 눈 밑에 검은 그늘이 생길정도로 나돌아 다니다니.
복장은 꼭 방글라데시에서 온 것 같고 화장은 시골장터화장에 표정은 온갖 신기한 것 쳐다보는 표정. 내가 봐도 너무 어리버리다. 겨우 미국에서 몇 년 살다 왔는데도 사람이 이리 어리숙해보이다니 역시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나보다. 내일부터는 좀 더 똘망똘망하게 행동해야지. 일단 눈 좀 붙이고 정신 좀 차리자. 휴....
김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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