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시간 끊어졌다
85분동안 끝맺음.
내셔널리그 챔피언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홈구장에서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탬파베이 레이스를 맞아 벌인 2008년 월드시리즈 5차전은 10월27일 오후 8시5분쯤(현지시간) 시작됐다. 3승1패의 필리스는 우승확정 1승만 더 올리기 위해, 1승3패의 레이스는 기사회생 1승만 더 올리기 위해, 필승카드를 선발투수로 내세웠다. 그러나 필리스의 콜 해멀스도, 레이스의 스캇 캐즈미어도 승패와는 인연이 없었다. 이닝을 거듭할수록 거세지는 호우 때문에 경기는 6회초 레이스 공격 뒤 중단됐다. 스코어는 2대2.
이튿날(28일)에도 수그러들지 않은 비는 29일에야 물러갔다. 이날 오후 8시41분, ‘끊어진 승부’가 다시 이어졌다. 어깨가 식어버린 해멀스와 캐즈미어를 이틀만에 또 내세울 수는 없었다. 결국 마운드는 불펜싸움이었다.
▷6회말, 필리스 1점 추가, 3대2 = 필리스 선두타자 제프 젠킨스가 3볼2스트라익에서 레이스 구원투수 그랜트 밸포어의 K존 가운데 낮은 쪽 패스트볼을 어퍼컷 스윙으로 한방 먹여 2루타를 만들었다. 다음타자 지미 롤린스가 3루쪽으로 초구번트 성공. 1사 3루에서 제이슨 워스가 ‘잘하면 멀티베이스 안타, 못해도 깊숙한 외야플라이’를 노리고 걷어올린 타구가 한참 솟구쳤다 2루베이스 뒤쪽으로 하강했다. 중견수가 달려나와 잡기엔 너무 멀었다. 2루수 아키노리 이와무라가 물러나며 잡기엔 조금 멀었다. 역모션 캐칭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볼은 이와무라의 가슴팍과 글러브 사이를 뚫고 흘러내렸다. 잡히는 줄 알고 귀루하던 3루주자 젠킨스는 웬떡이냔 표정으로 홈으로 튀었다. 3대2.
▷7회초, 레이스 1점 만회, 3대3 = 이틀 전 물러난 콜 해멀스에 이어 필리스 마운드에 오른 라이언 맷슨은 첫타자 디오너 나바로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4만5,000여 관중은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일렀다. 다음타자 로코 발델 리가 맷슨의 인사이드 테일링백 패스트볼을 받아쳐 왼쪽담장을 넘겼다. 이 홈런으로 콜 해멀스의 WS 2승은 날아갔다.
레이스의 반격은 계속됐다. 제이슨 바틀렛이 좌전안타로 출루하자 6회말 밸포어 뒤에 마운드에 섰던 투수 J.P. 하웰이 투수앞으로 번트를 댔다. 3대3에 1사2루. 필리스의 찰리 매뉴얼 감독은 맷슨을 빼고 왼손투수 J.C. 로메로를 투입했다.
왼손타자 이와무라를 잡겠다는 포석이었다. 이와무라는 필사적었다. 초구 스트라익 뒤 2구째 힘껏 방망이를 휘둘렀다. 빗맞았다. 공은 느릿느릿 투수를 넘어 2루쪽으로 흘렀다. 2루수 체이스 어틀리가 어느새 나꿔챘다. 이와무라는 거의 1루에 닿았다. 이때 어틀리의 기지가 번득였다. 4분의3쯤 역모션으로 공을 잡은 어틀리는 그대로 몸을 틀며 1루에 뿌리는 시늉을 했다. 2루에서 3루로 도망쳤던 바틀렛이 그 틈을 놓칠세라 홈으로 내달렸다. 아뿔싸. 어틀리는 너 잘 걸렸다 싶은 표정으로 두어스텝 조절한 뒤 홈으로 공을 뿌렸다. 바틀렛보다 1.5스텝쯤 먼저 공을 받아든 포수 카를로스 루이스는 태그를 면하려고 용을 쓰는 바틀렛을 명백하게 잡아냈다. 레이스는 3안타로 1점밖에 못얻고 물러섰다. 어틀리의 기지 넘치는 모션 하나가 흐름을 바꿨다.
▷7회말, 필리스 또 1점, 4대3 = 레이스의 조 매든 감독은 왜 6회말 1실점 뒤 원포인트 릴리프로 투입한 하웰을 7회초 공격 때 빼지 않았을까. 하웰에 미련이 커도 그때 대타를 내세워 승부수를 던졌어야 하지 않을까. 하웰에 대한 미련은 7회말 화근으로 나타났다. 첫 타자 팻 버렐에게 홈런같은 2루타를 맞았다. 월드시리즈 13타수0안타 끝에 큰 것을 날린 버렐은 홈런인 줄 알고 천천히 달리다 공이 펜스 윗자락에 맡고 필드쪽으로 꺾이는 바람에 갑자기 속도를 높여 2루까지밖에 못갔다. 처음부터 정상주행을 했더라면 너끈히 3루타 코스였다.
버렐 대신 대주자 브런틀렛이 나섰다. 셰인 빅토리노가 2루수 땅볼로 브런틀렛을 3루까지 보냈다. 다음타자는 SF 자이언츠에 있다 필리스로 간 페드로 펠리스. FoxTV 해설자 팀 매카버는 펠리스의 타점제조가 썩 좋지 않다고 한마디 걸쳤다. 그 말을 들었는지 펠리스는 보란 듯이 2루베이스와 유격수 사이를 뚫는 적시타를 날렸다. 4대3. 가끔 지나친 농담 때문에 눈총을 받기도 한 매카버 해설위원은 조 벅 캐스터와 함께 버렐의 13타수0안타를 들먹이고 내친김에 10타수 이상 무안타 선수들의 숫자까지 헤아리며 그의 부진을 얘기한 바로 뒤 끝에 홈런성 2루타를 구경했다.
▷8회초부터 9회초까지 = 스코어보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레이스는 8회초 공격에서 선두타자 칼 크로포드가 중전안타로 출루했으나 믿었던 B.J. 업튼이 유격수-2루수-1루수로 이어지는 병살타를 쳐 헛물을 켰다. 혹시나 했던 카를로스 페냐의 라이너성 타구는 좌익수 글러브에 빨려들었다. 8회말, 필리스의 공격은 그저 그랬다. 지미 롤린스 좌익수 플라이 아웃, 제이슨 워스, 삼진아웃 뒤 볼넷을 고른 체이스 어틀리가 2루도루를 성공했지만 뒤이은 거포 라이언 하워드가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이닝끝.
9회초. 초만원 관중은 승리를 확신한 듯 벌써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럴 만했다. 마운드에 100% 승리지킴이 브랫 릿지가 섰으니. 첫 타자 롱고리아가 그러나 28년만의 감격우승 피날레에는 덜컹시련이 섞였다. 선두타자 롱고리아를 2루수 플라이로 돌려세운 뒤 나바로의 우전안타에게 우전안타 허용. 곧이어 대주자 페레스에게 도루까지 내줬다. 1사2루. 발델리 대신 등장한 조브리스트는 우익수 라인드라이브로 물러섰다.
마지막 타자 에릭 힌스키. 초구? 1루쪽 파울볼. 포수 루이스의 가랑이 사이 손가락 사인에 고개를 몇번 끄덕인 릿지의 2구 슬라이더에 힌스키는 방망이를 휘두르다 엉거주춤 멈췄다. 그러나 늦었다. 스트라익. 관중들은 모두 일어섰다. 함성을 지르고 손수건을 흔들었다. 오른쪽 허리춤에서 두 손을 모은 릿지는 회심의 승부구를 던졌다. 힌스키의 방망이도 뒤질세라 돌아갔다. 방망이 가까이서 공은 가라앉았다. 방방이 혼자서 허공을 갈랐다. 구심의 손보다 먼저 루이스가 벌떡 일어섰다. 릿지 쪽으로 튀었다. 릿지는 그대로 양무릎을 대고 앉아 허리를 뒤로 젖히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야수들도 덕아웃 동료들도 코칭스탭도 일제히 마운드로 달려가 몸을 날려 겹치고 또 겹치며 봉우리를 이뤘다, 정상의 봉우리를.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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