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스, 불안하다던 모이어와 블랜턴은 기막히게 잘 던지고
레이스, 믿음직스럽던 페냐와 롱고리아는 기막히게 못 치고
2008년 메이저리그 야구 가을의 클래식 제1장 디비전 시리즈가 끝났을 때, 보스턴 레드삭스(아메리칸리그)와 LA 다저스(내셔널리그)의 리그챔피언 등극을 점치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흥행 측면에서도 동북부 강자 레드삭스와 남서부 강자 다저스가 붙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란 부채질도 제법 셌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노상 밑바닥을 기느라 올해 처음으로 큰 무대를 밟아본 탬파베이 레이스는 놀라운 응집력을 발휘하며 디펜딩 월드시리즈 챔피언 레드삭스를 4승3패로 물리치고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에 올랐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내셔널리그 최고봉 정복은 한층 싱거웠다. 1980년 이후 28년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필리스는 1988년 이후 20년만의 월드시리즈 제패 꿈에 부푼 다저스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끝에 4승1패로 내셔널리그 챔피언이 됐다.
다저스로서는 디비전 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에 고전할 것이라던 예상을 깨고 3연승으로 리그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한 뒤 필리스에 우세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맥없이 무너졌다. 결과는 결과다. 그것으로 끝이다. 고로 예상이 문제였다. 자칭타칭 야구전문가들이 먼 훗날도 아니고 코앞에 닥친 승부를 예측하면서 ‘결과적으로’ 헛다리짚기 경쟁을 한 셈이 됐다. 그것이 승부세계다. 흔히 인용되는 승리의 여신도 승패를 이랬다저랬다 조작할 수는 있어도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예상이 금지된 승부세계라면 얼마나 삭막할까. 제 아무리 틀리고 또 틀려도 게임이 있는 한 예상게임은 사라질 수 없다. 맞든 틀리든 이런 근거로 이런 예상을 내놓고 저런 근거로 저런 예상을 들이대며 군침을 돋우는 것은 승부세계의 빼놓을 수 없는 별미다. 디비전 시리즈부터 리그챔피언십까지,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마치 누가 누가 잘 틀리나 게임을 하듯 빗나간 점괘를 내놓곤 했던 전문가들이 월드시리즈를 앞두고도 알아맞히기 게임을 계속했다.
ESPN 등 관련사이트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의 점괘는 대체로 탬파베이 레이스의 우세였다. 근거는 수북했다. 그중에서도 필리스의 아킬레스건으로 입모아 지적된 것이 다음달이면 만 46세가 되는 3선발 제이미 모이어와 경험도 일천하고 구위도 어딘지 불안한 4선발 조 블랜턴이었다. 모이어와 블랜턴이 카를로스 페냐와 에반 롱고리아 등이 이끄는 레이스의 활화산 타선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일 것이고, 4승만 먼저 거두면 되는 7전4선승제 시리즈에서 최소한 2게임을 접고 들어가는 셈인 필리스가 레이스를 넘어서기엔 아무래도 버겁지 않겠느냐는 예상이 적지 않았다.
결과는 그런 예상들을 또다시 비웃었다. 모이어와 블랜턴은 기막히게 잘 던졌고, 페냐와 롱고리아는 기막히게 못 쳤다. 레이스 홈구장에서 벌어진 2경기에서 1승1패로 안고 필라델피아 홈구장으로 간 필리스가 모이어를 앞세운 25일 3차전과 블랜턴이 나선 26일 4차전에서도 거뜬히 이겼다. 시리즈 전적은 3승1패, 필리스는 1승만 보태면 대망의 왕중왕 트로피와 챔피언 링을 차지하게 된다.
▷3차전, 황혼의 모이어 아쉬운 역투 :
필라델피아 일대에 휘몰아친 강풍우 때문에 3차전은 현지시간으로 밤 10시6분에야 시작됐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늦은 시작이었다. 마운드에는 월드시리즈 역사상 2번째로 나이 많은 투수가 섰다.
제이미 모이어. 1962년 11월18일생, 쉰 고개가 희끗거리는 좌완투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날의 등판이 메이저리그 22년 경력의 모이어에게 난생처음 월드시리즈 마운드 나들이라는 점이었다. 1986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모이어는 20대인 1980년대 후반 소속 시카고 컵스로부터 마이너리그팀 코치를 해보라는 제의를 받았을 정도로 커리어 초기에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컵스의 제의를 거절한 그는 메이저 빅드림을 안고 이팀 저팀 전전하다 선수로는 환갑진갑 다 지났다. 그런데 올해, 그저 그런 팀이었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월드시리즈 마운드에 오르는 기회를 잡을 줄이야.
그러나 모이어의 노익장 피칭을 불안하게 본 것은 전문가들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필리스 팬들도 그랬을 것이다. 모이어가 올해 정규시즌에서 16승을 거뒀다고는 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는 2번 출격해 2패를 당했다. 디비전 시리즈와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필리스가 1패씩 당한 것은 모이어가 선발투수로 나선 날이었다. 백발의 찰리 매뉴얼 감독 대신 모이어에게 당장 지휘봉을 맡겨도 될 나이인데다 포스트시즌 성적까지 그랬으니, 현역 최고령 모이어의 월드시리즈 선발등판을 두고 필리스 팬들이 한편 경이로워하면서도 또 한편 불안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모이어는 피칭으로 불안을 잠재웠다. 6.1이닝동안 공 96개를 던지며 5안타와 1볼넷을 내주고 5삼진을 솎아내 3실점. 판정손해만 없었다면 그중 1점은 내주지 않아도 됐다. 필리스가 4대1로 앞선 7회초, 2실점의 빌미를 준 선두타자 칼 크로포드의 출루는 1루심의 판정실수로 빚어진 것이었다. 타자들의 타이밍을 절묘하게 빼앗는 모이어의 느림보 체인지업에 레이스 타자들은 속절없이 당한 뒤에, 크로포드는 1루쪽으로 기습번트를 날리고 냅다 뛰었다. 공을 던지는 폼이나 실제로 날아가는 공이나 세월아네월아 느리기만 했던 모이어는 크로포드의 기습에 대한 응전에서는 기민하고 용감했다. 다이빙을 하며 글러브 낀 손으로 볼을 나꿔챈 모이어는 공을 빼내지 않고 그 손 그대로 공을 정확히 1루로 던졌다. 1루수 라이언 하워드는 맨손으로 그 공을 받아들며 번쩍 치켜올렸다. 1루심의 판단은 달랐다. 양팔을 수평으로 펼치며 세입을 선언했다. TV 리플레이는 크로포드보다 공이 두어뼘 빨랐음을 거듭 보여줬다. 1루심은 덩치 큰 하워드 뒤쪽에 자리를 잡아 공의 입수 과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4만5,000여 관중은 야유를 퍼부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6회까지 3안타 1볼넷만 내주는 호투를 거듭했던 모이어는 1루심의 판정실수로 1사 주자없는 상황이 무사1루가 된 뒤, 곧바로 디어너 나바로에게 2루타를 맞아 2,3루의 위기를 맞았다. 운치기 3루주자 크로포드가 그로스의 1루쪽 땅볼 때 홈을 밟자(4대2) 매뉴얼 감독은 모이어를 덕아웃으로 불러들였다. 스탠드를 꽉 메운 관중은 모이어에게 기립박수로 경의를 표했다. 모이어가 남겨둔 3루주자 나바로는 제이슨 바틀렛의 유격수 땅볼로 홈인, 점수는 4대3이 되고 모이어의 자책점은 3점으로 늘어났다.
그래도 모이어는 메이저리그 데뷔 22년만에 처음 오른 월드시리즈 마운드에서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까지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8회초, 필리스 불펜과 내야진의 잇따른 실책으로 1점을 헌납하는 바람에 승리투수 기회는 날아갔다. 필리스는 9회말, 레이스 불펜과 내야진의 실수에 편승해 결승점을 뽑으며 하마터면 놓칠 뻔한 승리(5대4)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미 놓쳐버린 모이어의 승리는 회복되지 않았다. 승리투수는 J.C. 로메로에게 돌아갔다. 경기는 새벽 1시50분쯤 끝났다.
▷4차전, 블랜턴 눈부신 호투 놀라운 홈런 :
필리스의 4차전 대첩(10대2)의 주역은 라이언 하워드였다. 3점짜리와 2점짜리 홈런 2방을 포함한 4타수 3안타 5타점. 필리스가 벌어들인 10점 가운데 절반이 그의 방망이에서 나왔고, 그것으로 우열이 결판났다.
그러나 올해 정규시즌에서 48홈런을 때려 양대리그 통틀어 홈런킹인 하워드의 방망이는 맥을 못춰야 도리어 주목받는 것 아닐까, 레이스의 믿을 도끼 카를로스 페냐와 에반 롱고리야가 원인 모를 빈타 때문에 화제의 도마위에 오른 것처럼.
진정 놀라운 사건은 선발투수 조 블랜턴의 호투와 홈런이었다. 오클랜드 A’s에서 지지리 타선지원을 못받아 5승12패에 허덕이다 올해 후반기에 필리스로 옮긴 뒤 4연승을 거둬 9승12패가 되고, 내친 김에 A’s에 있었으면 꿈도 못꿨을 포스트시즌 마운드까지 밟은 메이저리그 5년차 우완투수 블랜턴(본보 23일자 스포츠섹션 참조)은 26일 난생처음 월드시리즈 선발출격에서 레이스의 타선과 필리스 팬들의 불안감을 동시에 잠재우며 6이닝 2실점(4안타 2볼넷 7삼진) 호투로 난생처음 월드시리즈 승리까지 거머쥐었다.
두고두고 못잊을 블랜턴의 전리품은 또 있다. 필리스가 5대2로 앞선 5회말, 왼쪽 담장 너머에 꽂아넣은 1점짜리 홈런이다. 블랜턴이 메이저리그 데뷔 이후 처음 때린 홈런이 자신의 월드시리즈 첫 출격의 승리를 굳히는 홈런이 됐다. 이 타석 이전까지 올해 정규시즌을 포함해 33타수2안타에 그쳤던 블랜턴은 이날 홈런으로 1974년 이후 34년만에 월드시리즈에서 홈런맛을 보인 투수가 됐다. 그 이전까지 합치면 월드시리즈 통산 15호 ‘메이드인 투수 홈런’인 블랜턴의 홈런이 작렬하는 순간, 거의 온통 붉은 유니폼을 입은 4만5,000여 초만원 관중은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축하했고 덕아웃에서 지켜보던 홈런킹 라이언 하워드는 껑충껑충 뛰며 우스워죽겠다는 표정을 지은 뒤 어리둥절 표정으로 금의환향하는 블랜턴를 하이파이브로 맞이했다.
전날 3차전에서 필리스의 8회초 실책에 편승해 동점을 만들었다 9회말 수비 때 뼈아픈 실책으로 무릎을 꿇은 레이스는 4차전에서도 투수 앤디 소낸스타인, 2루수 아키노리 이와무라, 3루수 에반 롱고리아 등이 초반에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러 대패를 자초했다. 레이스의 중심타자 카를로스 페냐와 에반 롱고리아의 방망이는 이날도 깨어나지 않았다.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둘은 도합 29차례 타석에 나서 단타 하나 못먹이고 삼진은 15차례나 먹었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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